보스니아분쟁 역사적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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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으로 시작된 유고내전사태는 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복잡하게 얽혀 해결의 기미가 안보인다. 유고내전이 이처럼 장기화하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태의 책임을 지고있는 지도자들의 입장을 시각적으로 조명해본다.
AD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이래 가톨릭과 그리스정교 세력권의 경계가 됐던 곳이 舊유고슬라비아 일대다.이곳에서는가톨릭의 크로아티아人과 그리스정교의 세르비아人이 가끔 충돌해왔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이밖에 회교도가 있지만 이는 14~19세기까지 이 지역을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지배했기 때문이다.오스만 투르크는 회교이외의 신앙도 인정했지만 회교로 개종(改宗)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개종해 이슬람교도가 된 사 람들도 민족적으로는 세르비아인들과 같은 南슬라브系다.
90년의 사회주의체제 붕괴로 故티토 유고대통령이 쌓아온 유고연방은 분열돼 91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兩공화국이 우선 연방으로부터 독립했다.이어 보스니아도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를92년 2월에 실시했지만 인구가 가장 많은 이슬 람교도에 지배되는 것을 두려워한 세르비아系가 유고연방에 남겠다고 주장,투표를 거부하면서 무력충돌로 발전했다.
이 시기 보스니아에 있었던 유고연방군은 세르비아인이 실권을 잡고 있었으며 동족인 보스니아 세르비아系를 지원,회교도와 전투를 벌였다.그러나 유고연방군은 국제사회로부터 내전 개입이라고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新유고연방(세르비아.몬테네그 로 兩공화국으로 구성)으로 철수했다.
그들은 철수하면서 다량의 무기를 세르비아系에 남겼다.때문에 장비에서 앞서는 세르비아系가 전투 초기단계에서 영토의 70%를장악했지만 병력면에서 우위에 있는 보스니아 정부군도 강력 저항,아직「승패」가 결정되지 않고 있다.
내전에는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系도 참가,한때 남부등에서 회교도와 격렬한 영토분쟁이 벌어졌으나,미국과 독일이 회교도와 연방국가를 만들 것을 강제적으로 수락시켜 잠정적으로 정전(停戰)이실현됐다.서방측은 회교도.크로아티아系연합 51% ,세르비아系 49%로 분할하는 평화안을 만들어 세르비아系에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세르비아系는 이에 대해▲많은 중요거점을 이슬람측에 반환해야 한다▲평화안에는 세르비아系의 의향이 반영돼 있지 않은데다 수정의 여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등을 들어 강력히 반발했다.평화안에 대한 세르비아系의 불만이 내전의 수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한편 舊유고지역에 파병된 유엔군 병력숫자는 모두 3만6천8백56명으로 이중에서 약 2만2천여명이 보스니아지역에 배치돼 있다. 평화유지군을 파견중인 국가는 모두 37개국으로 이중 프랑스가 4천6백3명으로 가장 많고,다음은 영국(3천5백16명),요르단(3천3백81명),파키스탄(2천9백75명)순이다.
이어 캐나다(2천26명),네덜란드(1천6백84명),말레이시아(1천5백43명),터키(1천4백77명)등으로 1천명 이상을 파견하고 있는 국가는 모두 15개국이다.
[자그레브=韓敬煥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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