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주치의 5명 인터뷰 ‘御醫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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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차흥봉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김대중(DJ) 대통령 주치의인 허갑범 박사와 장석일 의무실장을 한 호텔로 초청했다. 그 무렵은 2000년 8월 의약분업 전면 시행을 앞두고 의료계의 불만이 커지면서 총선 악영향을 우려한 정치권이 시행 연기를 주장하던 시점이었다. 차 장관은 두 의사에게 “의약분업은 DJ 대선 공약이다. 대통령 본인도 꼭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며 장황하게 의약분업의 당위성을 설명했다고 한다. 허 박사는 “당시 장관은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우리 의사 두 명이 혹시라도 어른에게 의약분업은 안 된다고 말할 것을 우려해 설득하려 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어의(御醫)’로 불리는 대통령 주치의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조선시대 승정원 업무 지침서인 은대조례(銀臺條例)에는 왕의 건강이 절대 외부에 누설해서는 안 되는 1급 기밀 사항으로 나와 있다. 그 ‘은밀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바로 대통령 주치의다. 전·현직 대통령 주치의 5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속’을 들여다봤다.

사돈이자 장로인 MB 주치의

대통령 주치의는 상징성 때문에 의사로서는 최고의 명예다. 사진은 이명박 대통령의 주치의로 지명된 최윤식 서울대 교수의 진료 모습이다. 그는 심장 질환의 손꼽히는 권위자다. [신동연 기자]

이명박 대통령의 주치의로 첫 임명된 최윤식 교수는 대통령과 사돈 관계다. 최 교수의 아들 의근(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전문의)씨가 대통령의 둘째딸 승연씨와 부부다. 대통령과 최 교수는 둘 다 교회 장로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어 ‘말이 잘 통하고 친한’ 사돈 사이라는 게 주위 사람들 얘기다.

서울대병원에서 부정맥 등 심장 질환을 진료하는 최 교수는 “지난 6년 동안 대통령의 건강 상담을 줄곧 해 왔다”면서 “사돈이 아니라 내과 의사로서 주치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은 매주 테니스를 칠 정도로 체력이나 건강이 젊은이 못지않다”면서도 “일이 격무인 데다 나이도 있는 만큼 1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에서 대통령 건강을 체크하고, 1년에 한두 차례는 정밀 종합검사를 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주치의는 대통령과 늘 함께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최 교수 경우처럼 대통령과 개인 인연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노태우·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주치의로 자신의 고교 후배를 썼다.

YS 주치의였던 고창순(당시 서울대 내과 교수) 박사는 매일 아침 있었던 청와대 조깅 멤버였다. 녹지원 트랙 4㎞를 뛰며 하루를 시작했던 조깅에는 김기수·정병국·이성헌·박진씨 등 최측근 보좌진만 참여했다. 경남고 후배로 수십 년간 YS와 친분을 쌓아 온 고 박사는 본인의 건강이 안 좋았다. 세 차례 암을 이겨낸 것으로 유명한 고 박사는 주치의 시절이던 97년 9월 간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한 달 뒤 캐나다로 떠나는 YS가 “고 박사, 니 괘않겠노”하며 말렸지만 그는 대통령 수행을 강행했다고 한다.

고 박사는 “YS는 임기 중 감기 한두 번 걸린 것 말고는 전혀 아픈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면서 “YS가 기자들에게 나를 가리키며 ‘내가 주치의의 주치의’라고 농담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최규완(당시 서울대 내과교수) 박사는 소화기 내과의 권위자. 대통령의 처남인 김익동 전 경북대 총장의 소개로 주치의가 됐다. 그는 사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초대 주치의가 될 뻔했다. 주치의 내정 단계까지 갔다가 최종적으로는 강남성모병원장인 민병석 박사가 낙점을 받았다. 2년 뒤인 83년 대통령 버마 순방을 수행했던 민 박사가 아웅산 테러로 숨지면서 두 ‘명의(名醫)’의 운명은 갈렸다.

2002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노 전 대통령이 세계 최고의 암센터라는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캐러링 암센터에서 수술을 받을 때도 최 박사가 주선했다. 하지만 지금 노 전 대통령은 심각한 퇴행성 신경질환을 앓고 있다. 몇 년 전 미국 메이오 클리닉에서 소뇌가 점점 위축되는 희귀질환 판정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의 한 핵심 측근은 “당장 오늘내일 돌아가시는 병은 아니지만 소뇌 기능이 계속 나빠지면서 몸 균형을 못 잡고 발음이 부정확해지는 언어 장애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국가 안보와도 직결

군 최고통수권자인 현직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 안보와도 연결된다. 90년대 중반 YS의 위 내시경 검사를 앞두고 청와대 의료진 간에는 격론이 벌어졌다. 막 도입되기 시작한 수면 내시경으로 대통령의 고통을 덜어 주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안전성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수면제로 대통령을 ‘가(假)수면’ 상태에 빠뜨리게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결국 YS는 일반 위 내시경을 받아야 했다.

의료계 핫 이슈 되기도

대통령의 건강은 의료계의 핫 이슈이기도 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허리 디스크가 고질병이었다. 당선인 신분이던 2003년 1월 그는 척추수술 전문병원인 우리들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때 적용된 ‘내시경-레이저 병용 수술법’을 놓고 관련 학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척추 내시경을 보면서 레이저를 이용해 수술하는 이 방법은 통증이 적고 간편하다.

하지만 상당수 대학병원의 신경외과·정형외과 교수들은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면서 반대했다. 의견이 갈렸지만 노 전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이상호 원장의 집도로 수술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수술 후에도 계속 허리가 안 좋았다.

노 전 대통령이 양방 주치의(송인성 서울대병원 내과 교수)와 별도로 한방 주치의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도 허리 통증과 관련 있다는 것이 의료계의 정설이었다. 1호 한방 주치의였던 신현대 박사는 한방 재활의학 전공자다. 신 박사는 “노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는 평소 한의학에 관심이 많았고 치료 효과도 많이 신뢰했다”면서 “(대통령께서)허리가 안 좋을 때는 1주일에 두세 차례씩 관저에서 침·봉침·전기침·부황 등의 한방 재활치료를 해 드렸다”고 소개했다.

재직 중 건강 문제가 자주 부각됐던 대통령은 DJ였다. 그는 임기 말년에 가면서 몇 차례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청와대 주치의와 의무실은 거의 비상 대기를 했다. DJ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당뇨병, 신장 질환, 고관절 장애 등의 지병이 있었다. DJ가 처음으로 비서울대 출신 주치인인 허갑범 박사를 발탁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연세대 의대 교수였던 허 박사는 97년 대선 과정에서 DJ의 건강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자 직접 진단서를 발급해 논란을 불식시킨 주인공. 허 박사는 국내 당뇨병 치료의 1인자이기도 하다.

대식가였던 DJ에게 허 박사는 늘 식사량을 줄이라는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

차관급 예우, 30분 거리 내 대기

주치의가 정식 위촉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인 63년. 종두법을 도입했던 지석영 선생의 종손인 개업의 지홍창 박사가 1호였다. 70년 서울의대 민헌기 교수로 바뀐 이후 지금까지 서울의대 내과 교수들이 맡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다. 고창순 박사는 “청와대 주치의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대통령과 30분 거리 내를 유지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면서 “서울대 병원이 최고 의료진을 갖추기도 했지만 청와대와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이라는 점이 고려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주치의는 의전상 차관급 예우를 받고 해외 순방 시 때로는 공식 수행원에 포함될 정도의 위상이지만 ‘미미한 액수’의 수당만 받는 무보수 명예직이다.

DJ 때 연세대에 주치의 자리를 뺏긴 서울대가 주치의를 다시 맡기 위해 학교 차원에서 뛰었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그 상징성 때문이다(민병석 박사는 가톨릭 의대 교수였지만 서울의대를 졸업함). 이번 주치의 선정 과정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고려대가 오동주 고려대 의료원장을 주치의로 밀었다는 말이 돌았다.

각 진료분야 자문위원 추천

주치의는 대통령 휴가 때도 동행하는 것이 관례다. 최규완 박사는 “노태우 대통령이 서울 시내를 벗어날 때는 반드시 주치의가 수행했다”면서 “매년 여름 대통령이 청남대로 2주씩 휴가를 갈 때 함께 가 바둑도 두고 테니스 심판도 봐드리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주치의가 누리는 권한 중 하나가 바로 20∼30명가량의 분야별 주치의 자문위원을 추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주치의 자문위원은 각 진료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의사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한 편”이라고 전했다. 이명박 정부가 한방 주치의를 임명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노무현 정부 때 있었던 10개 분야의 한방 자문위원도 대폭 축소가 불가피해 한의학계의 실망이 큰 상태다.

주치의보다 더 ‘가까운’ 의사

주치의보다 더 그림자처럼 대통령을 수행하는 의사가 있다. 청와대 의무실장이다. 경호실 소속인 의무실장은 청와대에 상주하지 않는 주치의를 대신해 항상 대통령 주위를 지킨다. 이 때문에 의무실장은 대부분 현역 군인이다. 군의관인 황일웅씨가 DJ 정부 말기부터 하다가 최근 다른 현역 군인으로 교체됐다. 청와대 의무실에는 의무실장을 비롯해 의무 대장, 간호 부장 등의 현역 의료진들이 돌아가며 24시간 대기 체제를 갖춘다.

역대 의무실장 중에는 대통령과의 친분 때문에 민간인이 기용된 사례도 있는데 이들 ‘민간인’ 의무실장은 상당한 실세였다고 한다. DJ 때 의무실장을 한 장석일 박사는 서울 성애병원 내과과장을 하던 92년 DJ가 지방자치선거를 요구하며 단식할 때 인연을 맺었다. 지금도 매주 동교동을 다니며 DJ의 신장 투석을 챙긴다. DJ는 임기 만료 6개월을 앞두고 장 박사를 주치의로 앉힐 정도로 아꼈다.

YS 시절 의무실장을 한 정윤철 박사도 개인적인 인연으로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가 YS의 부름을 받았다.

대통령과 가족들이 치료를 받는 곳은 서울지구병원이다. 박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인근 기무사 내에 만들었으며, 사실상 대통령 일가를 위한 병원이다. 대령이 맡는 병원장은 군의관 최고 보직인 의무사령관으로 가는 코스로 알려져 있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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