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명분과 실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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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西遊記)』는 중국 고전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돌산에서 태어난 손오공이 중국인의 심성을 사로잡은 이유는 뭘까. 흥미진진한 이야기 줄거리, 저팔계와 사오정을 필두로 하는 특이한 캐릭터를 우선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끌어가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관계를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삼장법사는 불경을 얻기 위해 서역으로 수만리 여정을 떠나는 구도자(求道者)다. 이에 비해 손오공은 그의 숭고한 뜻을 현실화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실행자다.

뜻이 아무리 높다 한들 그를 뒷받침하는 방법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불경을 얻으러 가는 삼장법사는 사실 현실적으로는 매우 연약한 존재다. 그를 지켜주는 손오공이 없을 경우 삼장은 그저 요괴들이 탐을 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손오공은? 불경을 얻어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삼장의 거룩한 뜻이 그곳에 얹히지 못할 경우 손오공은 그저 돌원숭이에 불과하다. 싸움을 잘 해 천궁(天宮)을 어지럽히고 둔갑술로 요괴들을 골탕먹이는 정도의 싸움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삼장은 사람이 마땅히 이뤄야 할 도(道)라 치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를 이루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손오공은 재주를 뜻하는 술(術)이라 할 수 있다. 도와 술, 바꿔서 말하자면 명분과 실용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에 앞서 장자(莊子)는 “명분은 실제의 손님(名者實之賓)”이라고 말했다. 명분과 실제를 손님과 주인의 관계로 설정했다. 주인만 있고 손님이 없을 경우 체통이 바로 서질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인 없는 손님이 있을 수 있을까.

명분과 실제의 함수관계를 따지는 논쟁은 동양사회에서 매우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른바 ‘명실론(名實論)’이다. 요약하자면 명분과 실제 어느 한 곳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둘이 서로 표리를 이루고 있어 함께 취해야 한다는 것.『서유기』는 이를 뭉뚱그려 재미난 이야기로 변주해 냈다.

요즘 실용론이 한창이다.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실용론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용론이 교조(敎條)로 변하면 곤란하다. 현실은 사람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유동적이고 다면적이기 때문에 이를 통합해 아우르는 명분도 그만큼 중요하다.

둘을 모두 섞어 때로는 실리로, 때로는 명분으로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게 뛰어난 리더십일 것이다. 실용의 화두에 지나치게 매달린다면 자칫 재주만을 뽐내는 원숭이 된다. 삼장의 숭고한 뜻도 함께 갖추자.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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