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전수자>6.한영숙流 승무 전승 李愛柱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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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아는 것이 많다고 해 「조지다(趙知多)」란 별호를 얻었다는 시인 조지훈(趙芝薰)의 찬탄은 그렇다치고 춤에 대해 생판 문외한이 보더라도 승무의 춤사위는 정말 좋다.
승무는 뿌리는 듯 맺고,맺는 듯 풀어주며,뻗어나는 듯 돌쳐나고,달음질치는 듯 본자리에 서있는,마디마디가 인간의 사유를 자극하는 선(線)의 미학(美學)이다.한(恨)을 바탕으로 하면서도춤꾼이 부리는 고깔과 장삼의 자재로운 태(態)를 타고 자유의 희열과 영원으로의 안식이 깊이 있게 묻어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가장 치열한 춤꾼」인 이애주(李愛柱.48.서울대체육교육과)교수가 승무에 홀딱 빠져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승무는 우리 민족성을 대표하면서도 인류에 보편적으로 통하는기본 몸짓이 중심이 돼있습니다.우리의 살아온 역사가 춤사위의 상징을 통해 뭉뚱그려져 있는 철학적인 춤이라고나 할까요.』 이교수가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맥을 잇는 기능보유자후보로 지정된 것은 93년.이 땅에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7년 서울시청앞광장을 비롯,곳곳에서 벌인 그녀의 살풀이 춤만을 기억하는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외겠지만 춤꾼으로서,승무 전수자로서의 내력을 더듬자면 꽤나 멀다.어릴 적부터 춤에 「끼」를 보였던 그녀가 어머니에게 이끌려 국립국악원에 맡겨진게 54년.어린 감수성으로 전통무용.소리.악기를 체득한 뒤 무용의 명문이던 창덕여중.고를 거쳐 서울사대 체육교육과에 서 무용전공으로 배냇자질이 다듬어졌다.대학원시절 졸업논문을 쓰면서 전통에 대한 무지(?)를 자각한 이교수는 문리대 국문학과에 편입학,유신의 암흑기동안김지하.임진택.채희완.장선우씨등과 교유하면서 탈춤등을 통해 춤꾼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의 몸가짐을 갖추게 된다.
승무와 인연을 맺게된 것도 바로 이 시절인 70년부터.
무용협회 주최 특강에 참가했다가 절세의 명무인 故벽사(碧史)한영숙(韓英淑)선생의 눈에 들면서였다.천부적인 춤꾼의 자질이 있음을 간파한 벽사가 그녀를 대번에 제자로 삼았고 그녀 역시 89년 스승이 작고할 때까지 곁을 지키며 벽사로부 터 「춤의 살과 피」를 전해받았다.벽사는 민주화운동시절 애제자가 거리로 뛰쳐나가자 가슴아파하면서도 『춤꾼으로서 대성하려면 천부적 자질,작품을 소화해내는 센스,그리고 이 두가지를 엮어 체득하는 노력의 삼박자가 필요한데 이를 두루 갖춘 사람은 그 애뿐』이라며대견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교수는 『아직 춤을 덜 춰 스승의 흉내를 내려면 멀었다』고 겸손해 한다.88년 이후 「현장」에서 상아탑으로 돌아온 이교수는 91년부터 전통춤연구회를 구성,승무 하나만을 가지고 「산다는 것과 춤추는 행위가 무엇이고 그것이 지금에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중이다.
李晩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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