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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에데사의 도마행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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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 37면

히브리대학 교정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희랍정교회 신부. 이 신부는 히브리대학에서 구약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기독교의 대세를 아르메니아정교회, 희랍정교회, 가톨릭으로 삼분하였다. 왜 프로테스탄티즘은 포함시키지 않느냐고 묻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톨릭 집안 내의 문제일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리고 가톨릭은 후대의 이방문화 전통이 마구 삽입된 비정통의 기독교집단이며, 초기 기독교 사도들의 전승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아르메니아·희랍정교회일 뿐이라고 못 박았다. 여기 감람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예루살렘에 야고보의 교회가 있었을까? [임진권 기자]

오스로외네 왕국 에데사를 중심으로 일찍이 도마기독교(Thomas Christianity)의 전통이 성립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대에 대중적 인기를 얻은 마태기독교나 베드로기독교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전통인, 야고보기독교나 도마기독교의 전통이 에데사와 관련돼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가 편지를 쓰다

야고보나 도마는 모두 예수의 친형제라는 가설의 진위를 떠나 역사적 예수와 보다 밀착된 어떤 로기온 전승을 지킨 그룹의 상징이었다. 흔히 이들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활약했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하여 시리아 동북 지역의 에데사로 그 거점을 옮기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도마복음서 속에서는 야고보와 도마는 예수말씀의 정통적 지킴이로 등장한다. 그리고 살로메(Salome)와 마리아(Mary)는 진실한 제자를 대변하며, 바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베드로와 마태, 그리고 집단적인 용례로서의 ‘제자들(the disciples)’은 항상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며, 도마 전승의 사람들이 배척하는 예수그룹을 대표한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전쟁이 일어나면서 AD 70년 전후로 도마기독교 사람들이 그들을 지원하는 안전한 북방의 에데사로 거점을 옮겼다는 가설은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러나 4세기 초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미 예수 당대에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와 역사적 예수 본인 사이에 구체적 서한의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가르왕은 질병과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소문으로 익히 알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에데사의 문서 보존 창고에서 아브가르왕과 예수 사이에 오간 편지를 기록한 시리아문서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자랑하면서, 그것을 시리아어로부터 다음과 같이 희랍어로 번역해놓았다. 전령(courier) 아나니아스(Ananias)를 통해 예수에게 보내진 아브가르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나 아브가르 우카마, 에데사의 군주, 예루살렘 지역에 나타난 훌륭한 구세주 예수에게 문안하오. 나는 당신과 당신의 치료에 관하여, 특별히 마약(pharmakn)이나 약초(botann)를 쓰지 않고 잘 고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소. 더욱이 장님에게 시력을 회복시키고, 절름발이가 걷도록 하며, 문둥이를 깨끗이 하고, 더러운 악령과 악마를 몰아내며, 고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고쳐주며, 심지어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익히 들었소.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신에 관하여 다음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소. 당신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하강한 하나님(theos)이거나 하나님의 아들(a Son of God)일 수밖에 없소. 이러한 이유로, 나는 당신이 빨리 나에게로 와서 나의 고통을 해방해 주도록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바이외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당신을 조롱하고 박해한다고 들었소. 나는 작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훌륭한 도시를 소유하고 있소. 당신이 지내기에 이상적인 곳이라 생각되오.”

이 편지를 받은 예수는 아나니아스를 통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나를 보지도 않고 나를 믿는 그대여, 복이 있도다. 나에 관하여 이미 기록된 바, 나를 본 자는 나를 믿으려 하지 않고 나를 보지 않은 자가 오히려 나를 믿고 생명을 얻는다 하였도다. 그대가 나에게 왕진을 요청하며 쓴 것에 관하여, 나는 먼저 이곳에서 내가 보내진 사명을 완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리노라. 이곳에서 나의 임무가 완수되면, 나는 나를 보낸 그이에게로 다시 들리우리라. 내가 들리울 때 나는 나의 제자 중 한 사람을 그대의 고통을 고치기 위해 파견하리라. 그는 그대와, 또 그대와 같이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리라.”

그 편지 말미에 시리아어로 예수 사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고 한다. 도마(쌍둥이)인 유다는 아브가르왕에게 70제자 중 한 사람인 다대오(Thaddaeus)를 보냈는데, 그는 에데사에서 토비아스(Tobias)의 아들, 토비아스의 집에 머물면서 이적을 행한다. 결국 다대오는 아브가르왕을 대면하기에 이른다. 다대오를 대면한 아브가르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그대의 스승 예수에게 무한한 신념을 품었노라. 로마제국의 권세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군대를 보내어 쳐부쉈을 것이다.”

다대오는 말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대 머리 위에 손을 얹노라.” 그 순간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질병과 고통이 사라졌다. 마약과 약초를 쓰지 않는 다대오의 치유와 선교는 계속된다. 드디어 전 국민과 왕이 모여드는 광장에서 그는 설교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지옥 하데스로 사흘간 내려가 있다가(descended into Hades), 모든 군중이 보는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간 사건을 선포한다. 이 일들은 340년에 일어났다. 에데사 기원 340년이란 AD 30년을 의미한다.

과연 독자들은 이러한 문서기록을 진실한 역사의 기술이라고 믿을 것인가? 우리는 4세기 초의 기독교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예수상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쾨스터는 도마기독교가 에데사에 일찍 정착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에데사 도마기독교(Edessene Thomas Christianity)가 2세기에 마르시온파를 포용하는 등 로마 정통기독교와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자 에데사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따라서 그 원조인 도마의 족보를 폄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팔루트(Palut)가 에데사의 비숍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에데사의 도마기독교를 서방정통교회(Western orthodoxy)로 전향시켰고, 그에 대한 반발로 도마기독교 신봉자들의 상당수가 마니교로 흡수되었다고 본다. 하여튼 이러한 서방화의 과정 속에서, 아브가르의 전설도 원래는 도마가 주인공이었으나, 도마가 탈락되고 다대오로 대치되었다고 본다.

많은 사람이 AD 3세기 초 에데사에서 성립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는 문헌, 『도마행전』(Acts of Thomas)과의 관련성 때문에 도마복음서가 에데사에서 성립한 문헌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도마행전』의 첫머리에 “쌍둥이(디두모)라 불리는 유다 도마”가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바라 알란드(Barbara Aland)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에데사 전승을 거부한다. 1)에데사는 시리아어 권역이며 희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도마복음서는 당초에 희랍어로 쓰여졌다. 2)‘유다 도마’라는 이름은 동부 시리아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3)『도마행전』의 저자가 도마복음서를 참고했다는 퓌에쉬(Peuch)의 분석은 문헌적 근거가 박약하다.

나 도올은 도마복음서가 에데사 전승의 산물이라는 비정은 억측의 소산이라고 간주한다. 도마복음서는 예수운동의 가장 오리지널한 층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성립한 독자적인 문헌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이제 도마복음서 본문에 즉(卽)하여 논의되어야 한다.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는 제39편까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시중에 나와 있다. 다음주부터 본문의 주석이 시작된다. 단행본『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이집트·이스라엘 초기 기독교 성지순례기』를 참고하면서 따라오면 보다 효율적으로 본문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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