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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5대 대통령 ‘메드베데프 시대’ 개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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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달 11일 크렘린에서 러시아 최대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의 설립 15주년을 기념하는 축하 콘서트가 열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가스프롬 회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제1부총리 등 주요 정치인들이 모두 참석했다. 주최 측은 영국 록그룹 딥 퍼플을 특별 초대했다. 메드베데프를 위한 깜짝쇼였다. 공연 후 딥 퍼플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메드베데프는 “어린 시절 영웅을 크렘린궁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메드베데프는 1965년 9월 14일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나톨리는 기술대학의 교수였고, 인문학자인 어머니 율리야도 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학교 시절 친구들은 그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기억한다. 소련 백과사전을 통째 외우고 다녔고, 학교 성적은 항상 ‘수’나 ‘우’였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 베라 스미르노바는 “그는 항상 공부만 하고 길거리에서 노는 일이 거의 없어 ‘애늙은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블랙 사바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같은 영국 록밴드의 음반을 몰래 녹음해 듣는 록 음악광이었다. 당시 록 음악은 소련 당국에 의해 퇴폐적 부르주아 문화로 낙인찍혀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메드베데프는 “중학생 시절부터 하드록을 들었다. 딥 퍼플의 음반은 70년대 원판을 모두 갖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메드베데프는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푸틴이 12년 먼저 이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두 사람을 모두 가르쳤던 지도교수 발레리 무신은 “디마(메드베데프)는 조용한 성격이면서도 리더십과 열성이 남달랐다”고 말한다. 그는 법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모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레닌그라드대학 민법학과 학과장 아나톨리 솝차크 교수가 초대 레닌그라드 시장에 당선됐고 메드베데프는 그의 법률보좌관이 됐다. 1991년 메드베데프는 역시 솝차크 시장 밑에서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던 푸틴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두 사람을 모두 알았던 스타니슬라프 벨콥스키 국가전략연구소 소장은 “메드베데프는 유순하고 부드러우며 심리적으로 의존적이었다. 항상 푸틴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 했다”고 회상한다. 96년 솝차크가 재선에 실패하자 두 사람은 실업자가 됐다. 푸틴은 일자리를 찾아 모스크바로 갔고, 메드베데프는 사업가로 변신해 제지회사인 ‘핀 첼’(이후 ‘일림 펄프 엔터프라이즈’로 개칭)의 설립에 참여했다. 이 회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지펄프회사가 됐다. 메드베데프는 99년 푸틴이 실장으로 있던 내각 행정실의 부실장을 맡아 모스크바로 가면서 이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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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옐친 퇴임 후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면서 메드베데프는 크렘린 행정실 부실장에 올랐다. 동시에 가스프롬 회장에도 취임했다. 2003년엔 행정실 실장이 됐고 2년 뒤엔 주택·교육·보건·농업 등 민생부문을 책임지는 제1부총리로 초고속 승진했다. 그리고 푸틴은 지난해 12월 ‘실로비키’(정보기관·군·검찰 출신들)의 강력한 저항을 뿌리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메드베데프는 푸틴과 너무 대조적이다. 푸틴은 전형적인 ‘러시아 사나이’다. 공장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골목대장을 할 정도로 거칠게 자랐다. 유도 같은 격투기를 좋아하고 군인처럼 심한 욕설을 내뱉기도 한다. 전쟁영화를 즐기며 러시아 전통 음악을 자주 듣는다. 어린 시절부터 많이 본 스파이 영화 때문에 일찍부터 KGB 요원이 꿈이었다. 그의 몸속엔 소련식 애국주의와 권위주의의 피가 흐른다. 2005년 4월 상원 연설에서 “소련 붕괴가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참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인텔리 집안에서 자란 메드베데프의 스타일은 자유주의에 가깝다. 지금도 청바지와 가죽재킷을 즐겨 입는다. 키가 1m64㎝ 정도이며, 수영·체조·요가처럼 부드러운 운동을 좋아한다.

그가 쓴 민법 교과서는 러시아 법대생들의 필독서일 정도로 인기가 높다. 푸틴이 동독에서 KGB 요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메드베데프는 모교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일했다.

메드베데프는 동갑내기인 스베틀라나 메드베데바와의 사이에 12세 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7세 때부터 알게 된 초·중·고 동창이며 89년 결혼했다. 스튜어디스 출신의 푸틴 대통령 부인 류드밀라 여사가 조용한 내조형인 데 반해 스베틀라나는 패션쇼 큐레이터와 교육 프로그램 운영자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해 왔다.

모스크바=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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