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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난민 인정받은 콩고 민주共 기관원 ‘음보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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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22면

콩고인 무와나 음보카가 김종철 변호사(오른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탈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신변 보호를 위해 얼굴과 실명 노출을 꺼렸다. 무와나 음보카도 ‘나라의 아들’ 이란 뜻의 가명이다. [최정동기자]

2002년 9월 16일 콩고인 무와나 음보카(41)가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섰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이었다. 그는 입국심사대에서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갑자기 콩고行 비행기 태울까 두려움에 떨어 ”

“콩고로 돌아가면…목숨이 위험해집니다…도와주세요.”

자신이 ‘난민’임을 알린 것이다. 난민은 정치적 의견이나 인종·종교 등의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을 말한다. 난민으로 인정되면 국제협약에 따라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다. 프랑스어 통역이 나왔다.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은 프랑스어가 공용어다.

“난민 신청 이유는?”

“저는 국가정보기관에서 일하는 기관원입니다. 야당 당원이기도 했고요. 첩보 활동을 하던 중 르완다 등 인접 국가와 콩고 정부, 반군이 모의해 콩고를 분할하려 한다는 계획을 알게 돼 상부와 야당에 보고했는데….”

야당에 보고한 것이 발각돼 국가정보기관 요원들에게 체포된 뒤 비밀 감옥에 갇혔다는 얘기였다. 감방 동료들이 간수를 매수해 탈출시켜준 덕분에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고 밝혔다. 면담관은 “난민 심사에 6개월 정도 걸리는데, 그동안 주거지와 생활비, 의료 혜택이 제공된다. 그때까지 심사가 끝나지 않으면 취업 허가가 나온다”고 말했다. 음보카는 창밖을 내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얘기는 가상 상황이다. 2002년 9월 16일 음보카가 실제 발을 내디딘 곳은 대한민국 인천항이었다. 음보카의 얘기다. “콩고를 탈출하기 위해 무작정 택한 나라가 중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콩고 관계가 긴밀해 송환되지 않을까 불안했어요. 일단 빠져나가자는 생각에 톈진을 거쳐 ‘코리아’를 선택했습니다. 콩고 사람들은 한국을 잘 몰라요. 그래서 그때 저는 북한 땅에 도착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돈 한 푼 없이 한국에 도착한 그를 도와준 것은 한 민간단체였다. 그는 자신이 먹고 자는 데 쓸 돈은 불법 취업을 해서라도 스스로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기도 가평에 있는 사료공장을 소개받았습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육체노동이었지요.”

콩고에서 대학원을 나온 인텔리인 그에겐 고통의 연속이었다. 40~50㎏짜리 건초 더미를 들어올려야 했다. 하도 용을 쓰다 보니 탈장(脫腸)까지 됐다.

그런 와중에 2002년 11월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에 난민으로 인정해 줄 것을 신청한 뒤 20차례 이상 인터뷰를 했다. 초반 4, 5차례는 프랑스인 신부가 통역해줬지만 이후에는 대부분 면담관과 일대일로 영어로 인터뷰했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영어로 콩고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탈출 경위를 설명하다 보니 자꾸 오해가 생겼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경고가 반복됐다. 콩고 탈출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했던 거짓말 몇 마디가 상황을 더 꼬이게 했다.

“콩고로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무조건 듣고, 말하고, 외웠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이었지요.”(음보카)

지금 그의 영어 구사력은 웬만한 회화 강사를 뺨친다. 음보카를 비롯해 9건의 난민 사건을 담당해온 김종철(기독변호사회) 변호사는 “난민 신청자가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알리려면 적절한 통역이 제공돼야 한다”며 “변호사 등 제3자가 면담에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 인접 나라에 들어가 난민 신청을 하면 인터뷰를 하다가 갑자기 귀국행 비행기에 태워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음보카는 자신도 비슷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출입국관리국에 ‘인터뷰 때 음보카 옆에 앉아만 있어도 안 되겠느냐’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법무부는 2005년 6월 ‘난민 인정 불허’ 처분을 내린 데 이어 지난해 5월 이의신청도 기각했다. “진술에 일관성이 없고, 정부와 야당 양쪽에 모두 보고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꼬박 4년반이 지나서야 정부 차원의 최종 결론이 나온 것이다.

음보카는 우리 난민 행정의 맹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심사에 짧으면 1년, 길게는 5년 이상 걸리고 그 기간 중 아무런 생계 지원도 해주지 않으면서 취업마저 금지한다. 90일 단위로 체류 기간을 연장해야 하는 불안한 생활이다. 신청자 입장에선 심사 과정도 호의적이지 않다. 법무부 측은 “난민 신청이 주로 접수되는 서울출입국관리소 난민실 직원이 6명에 불과해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예산과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답변했다.

난민 인정 폭을 둘러싼 논란도 거세지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난민 신청자는 1804명으로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65명. 법무부는 “난민인지 엄밀하게 심사해 나온 결과”라며 “심사를 마친 454명을 기준으로 하면 인정 비율이 14~15%로 낮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파룬궁’ 수련자들의 난민 신청을 거부한 데서 볼 수 있듯 해당 국가와의 관계 악화 가능성이나 난민들이 몰려오는 쏠림 현상을 우려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선 “정책적 고려는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인구 1000명당 보호 난민 수를 따져보면 38개 산업화국가 가운데 최하위다. 난민 지원단체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는 “국제·경제적 위상에 맞지 않게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다”고 했다.

“고국에 돌아가 박해를 받을 가능성을 입증할 책임을 너무 엄격하게 요구하고 있어요. 음보카의 경우 자신의 체포 사실을 보도한 현지 신문 기사를 제출했고요. 내가 직접 콩고에 가 조사 기록을 복사해 왔지만 믿어주지 않더군요.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박해 받을 가능성이 10%만 있어도 난민으로 인정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난달 20일 법무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하라”는 판결을 받아
낸 음보카는 현재 ‘피난처’의 자원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매달 두세 차례 콩고 반정부 인터넷 라디오의 정치평론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자신의 기관원 경험을 토대로 콩고 정치의 문제점을 비판하는데, “다음 대통령감”이란 말을 들을 만큼 ‘망명 정치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콩고에 돌아가면 ‘한강의 기적’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게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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