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를 위한 건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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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24면

정기용 건축가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손잡고 건립한 제주 기적의 도서관.

신촌에 있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 골목만 돌아서면 한 군데씩 꼭 공사 중이었다. 널브러진 철근과 팍팍한 흙먼지가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파헤쳐진 보도블록을 피해 걸으며 ‘다음달이면 다 끝나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한 채가 완성되면 다른 건물이 또 요란한 기계음에 무너졌다. 결국 졸업 때까지 신촌의 풍경은 ‘한쪽은 늘 공사 중’이었다.

“이런 속도로 파괴와 건설이 지속되다가는 궁극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실종되고 오직 미래만 남을 것이다. …늘 건설만 하면서 살아 있어야 할 도시는 실종되고, 앞으로 태어날 도시란 늘 그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 서울이 그렇고 이 나라 전체가 그런 모습이다.” (『사람, 건축, 도시』 45쪽)

어느 생태운동가나 환경철학자의 경고가 아니다. 평생 집을 짓고 만들고 그려 보인 건축가의 시대 진단이다. ‘공간의 시인’ ‘감응의 건축가’ ‘생태 건축가’ 등으로 불리는 정기용씨는 오늘날의 건축이 본래의 철학을 잃어버렸다고 본다. 건축과 도시가 공간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형태’에 집착하기 쉬우나 궁극적으로 건축이 할 바는 사람의 삶을 조직하고 사회를 다루는 일이라는 것이다.

집은 단순히 거주하는 영역이 아니라 가족을 만나고 몸을 뉘는 곳이자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오는 장소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이 뛰면서 집은 제때 구매하고 처분해야 할 재화의 일종으로 전락했다. 현대 도시인은 외부세계의 장단에 맞춰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하는 유목민과 다름없다. 테헤란로의 크고 작은 빌딩들을 가리켜 “성장의 막대 그래프 같다”고 표현한 건축가의 눈은 실로 매섭고 애틋하다.

20여 년간 한국의 건축과 도시에 대해 치열한 글쓰기를 실천해 온 정씨는 특히 서울에 대한 남다른 성찰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다’(『서울 이야기』)라는 제하의 글에 실린 다음의 문장을 음미해 보라. “숙정문이 개방되고 촛대바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체험하게 된다면… 시민들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평당 가격이 상승해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그들이 바라본 자연과 도시가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사는 집을 얘기할 때 어느 동네 어느 회사가 지은 몇 평짜리 규모라고 대답하지만 정씨는 “나의 집은 100만 평”이라고 말한다. 주소지로 두고 있는 집만 생각하는 건 삶의 거주공간으로서 집에 대한 이해가 좁고 얕은 탓이다.

명륜동 다가구주택에 살면서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과 북악산을 삶의 영역 안에 포괄시키니, 그가 사는 ‘집’은 100만 평짜리라는 것이다. 거주에 대한 이런 우주적인 사고에서 그는 말한다. “도시 건축이, 그것도 대형 도시 건축물을 설계함에 있어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건축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압축적인 개발과 성장의 역사 때문이리라. 수탈과 전쟁의 시기가 지난 뒤 우리는 참혹한 기억을 지우고 ‘새마을’을 건설하는 데 매달려 왔다. 일제 총독부 건물이었다는 이유로 근대건축의 한 장면을 역사에서 말소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지는 근대의 유적들 앞에 헛헛한 이유는 그 속에 깃든 우리의 집단 기억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불타버린 숭례문이 무참한 것은 ‘국보 1호’를 잃어서만이 아니다. 고향을 떠난 유목민이 무의식중에 정 붙였던 서울의 기억이 그와 함께 으스러져 갔기 때문일 터다.

척박한 건축환경에서 건축의 인문학적 정신을 강조해 온 정씨는 경계 없는 글쓰기를 통해 인접 학문과의 교류에 힘써 왔다. 부엌에서 우주로, 외가 토담집에서 전쟁기념관으로, 전통가옥에서 최신 건축물로, DMZ에서 공동묘지로 넘나드는 포괄적인 사유는 한국 건축의 지평을 넓혀온 것으로 칭송된다. 『서울 이야기』 와 『사람, 건축, 도시』는 정기용 건축가의 건축 인생을 집대성하는 전집의 1차 발간물이다.

이 밖에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무주군에서 작업해온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무주 공공프로젝트』(가제)와 ‘기적의 도서관’으로 잘 알려진 『어린이도서관 프로젝트』(가제), 그리고 30여 년간의 작업을 모은 『정기용 작품집』(가제) 등이 전 5권에 걸쳐 발간될 예정이다.
그런데, 신촌의 공사는 이제 다 끝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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