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마크가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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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말 너무 죄송해요. 제가 못해서 한국이 16강에서 탈락한 거예요.”

지난해 말 중국에서 귀화한 탁구 국가대표 당예서(27·대한항공)는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네덜란드와의 16강전에서 한국이 2-3으로 패한 것을 자신의 부진 탓이라며 자책했다.

한국말이 유창하지는 않지만 의사 소통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당예서. 그는 29일 광저우 한국선수단 숙소에서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태극 마크가 이렇게 무거운지 몰랐다. 실망스러운 플레이를 해서 한국민들께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번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탁구 대표팀은 국내 1위인 그에게 주장을 맡겼다. 그러나 당예서는 조별 예선에서 3-0으로 완파했던 한 수 아래의 네덜란드를 맞아 혼자 두 게임을 모두 내주며 맥없이 무너졌다.

세계대회에 출전하고 싶어 모국 중국을 떠나 낯선 한국 땅에 둥지를 튼 지 8년. 올해 초 꿈에 그리던 태극 마크를 달았고, 기대를 안고 처음 출전한 이번 세계선수권에서의 졸전에 그는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한국 대표가 되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었어요. 그러나 너무 긴장을 했는지 네덜란드전에서는 다리가 후들거렸어요”라며 울먹였다.

“다음에는 잘할 수 있으니 지켜봐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번 세계선수권이 중국에서 열린 점도 당예서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중국 언론은 이번 대회에 출전한 그녀를 겨냥해 연일 독설을 퍼부었다.

“중국에서는 실력이 안 통하니까 한국으로 갔다”는 말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조국을 등진 배신자’라는 비난에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그럴수록 당예서는 이를 악물었다고 했다.

당예서는 “나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다. 탁구 경기에서 중국은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잘해 보이고 싶었어요. 그런데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몸은 더욱 굳어져 갔다”며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2006년 여름 결혼한 당예서는 기러기 아내다. 중국인 남편 구샤춘(38)은 베이징에서 개인사업을 하기 때문에 떨어져 지낸다. 남편은 28일 밤 베이징에서 날아왔다. 부부가 모처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는 남편에게서 또 질책을 받았다.

“너무 잡생각이 많고 긴장하는 것 같다. 어렵게 얻은 기회이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남은 기간 동안 오로지 탁구만 생각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요즘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한국대표 선발전에서 전승 우승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자만심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코칭스태프가 지시하는 힘든 체력 훈련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체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실토했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술은 물론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가 돼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도 소득이었다.

“저의 강점인 백핸드에 비해 포핸드가 약하고 결정구가 없다는 것도 반드시 보완해야겠어요.”

당예서가 이번 패배를 딛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찬란한 메달의 꽃을 피울 수 있을지 탁구인들은 주목하고 있다.  

광저우=문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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