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서하노이까지>5.끝 하노이의 明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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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호치민市에서 하노이행 베트남항공에 오른 기분은 마치 부산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탄 착각을 일으킨다.신드바드 모험에 나오는 언월도처럼 휜 기다란 인도차이나반도(半島)를 곧장 북상하면 하노이다.기자가 마지막으로 날던 이 하늘엔 포탄이 날고 헬리콥터와전투기의 고막째는 소리뿐이었다.호치민市와 하노이는 하루에 두편,승객이라야 공무원과 외국투자자들이 대부분이다.
고급관리로 보이는 옆자리 승객에게 말을 붙여본다.하노이 국가계획위의 간부였다.국가계획위는 도이모이(쇄신)를 주도하는 정치경제의 실세 집단이다.내가 한국인임을 알고 던지는 그의 질문은『빨리 잘살게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였다.『당 신네가 잘 살려면 전쟁에 졌어야 하는데….』패전국 일본과 독일의 부흥을 모르느냐는 나의 조크에 그는 근엄한 표정을 풀고 활짝 웃음을 터뜨린다. 게릴라가 정글은 잘 기지만 국제장터를 잘 파고들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혁명가를 장사꾼으로 바꾸는 어려움을 실토한다.이윤추구와 고객만족의 새로운 게임법칙은 아득한듯 했다.
베트남엔 지금 설계도가 없다.통계도 엉망이다.
우리나라 투자자들이 겪는 첫 고통은 엉터리통계 때문이다.인프라를 탓하기 전에 그 인프라를 깔 설계가 없는 것이다.시장경제로 갈 것이냐,사회주의를 고수할 것이냐로 설계도 없이 20년을허송한 것이다.하노이거리,어깨지게와 자전거나 다닐 수 있는 도로에 달구지로부터 벤츠까지 바퀴달린 것은 모두 나와 구르고 있다.차선(車線)이 있을 리 없다.신호등도 정전 때문에 있으나 마나다. 하지만 서울의 교통대란(大亂)과는 다르다.모두가 알아서 간다.충돌없이 잘도 간다.요리조리 막힘없는 거리의 곡예(曲藝)다.커다란 트럭 한대가 그 틈바구니에 끼어 쩔쩔매는 모습을본다.수백대의 인력거에 갇혀 꼼짝못하는 대형트럭-하노이 를 걸으면서 미국이 전쟁에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실감했다.모기를잡기위해 휘두른 도끼 생각이 난다.
전쟁 당시 미국언론은 베트콩 1명 사살에 50만달러가 들어가는 소모전을 꼬집어댔다.최근 미국의 전쟁포로센터는 실종미군(MIA)을 데리고 오면 1인당 1백만달러를 주겠다고 내걸었다.
하노이 정부는 미국에 대해 베트남이 더 많은 피를 흘렸음을 말하려는듯 월맹군 희생자가 1백10만명이라고 발표했다.이 계산법대로라면 미국은 「지는 전쟁」을 위해 5조달러가 넘는 전비를퍼부은 셈이다.
베트남의 국내총생산(GDP)는 94년기준 1백50억달러-.5조달러의 전비를 통일비로 썼다면 3백년동안 베트남을 먹여살리고도 남을 돈이다.
***3백년 쓸돈을 전쟁에 거리에는 군복차림이 눈에 많이 띈다.모자도 옛사이공엔 제멋대로 생긴 야구모자가 흔한 반면 하노이엔 호치민 모자(정글모)가 주종(主宗)이다.사이공에 있다가 하노이에 오니 마치 베니스 상인을 보다가 갑자기 프러시아 군인을 만난 기분이 든다.
아테네는 끝내 스파르타에 먹혔지만 하노이는 사이공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하노이는 1세기동안 세계 최강국과 싸워 모두이긴 군사대국의 수도라는 생각이 새삼스럽다.수수깡처럼 마른 이들이 디엔비에푸에서 프랑스,베트남戰에서 미국,中-베트남 국경전쟁에서 중국을 물리친 것이다.하지만 이 백전백승의 웅도(雄都)는 지금 두개의 전혀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다.화해,그리고 부패와의 전쟁이다.새로 만난 적은 외세(外勢)가 아니다.가난이라는 먹구름속에서 싸우는 내부 의 전쟁이다.
화해는 민족통합이지만 부패의 첫번째 희생자는 외국인들이다.외국인에게는 무조건 바가지를 씌운다.사이공에서 하노이까지 기자는그 관리보다 3배나 비싼 비행기값을 내야 했다.공원입장료도 외국인에겐 3배를 물린다.한달에 8달러짜리 아파트 를 외국인이 세들려면 2천달러를 요구한다.
집주인은 당간부나 공무원들이다.지하경제가 흥청거리고 뇌물이 횡행한다.하노이에 오렌지族이 있다는 말에 놀랐다.공무원 자제들이다. 베트남에는 재벌이 딱 하나 있다.그것은 정부다.정부가 장사를 하는 것이다.
나라예산이 없어 30%밖에 대줄 수가 없기 때문에 부처마다 장사를 벌여야 한다.내무부는 술집을 경영한다.관세청은 고객을 잘 만났다.외국기업이 고객이기 때문이다.호텔은 관광부 직영이다.외무부는 외국인 아파트를 지어 세내주는 업자요 복덕방인 셈이다.문어발은 상식이다.
『마침내 우리는 베트남 신드롬에서 깨어났다.』이라크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부시대통령이 한 말이다.베트남 신드롬이 얼마나 깊고 쓰라렸기에 대통령이 그같이 말했을까.베트남을 소재로한 소설『뒤로 돌아』(About Face)를 쓴 데이비드 헤크워스는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고 반박한다.
***가난해도 統一 부러워 전쟁의 주역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참회록」이 나왔어도 베트남病은 나을 수 없다.치유될 수 있는 전쟁이란 없다.대리전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으며 승리없는전쟁에 뛰어들지 말아야 한다.당시 월남 정부군은 미국의 등에 업혀 싸웠고 미국은 등에 업힌 사이공을 지키기 위해 국력을 쏟았다. 우리도 그 이길 수 없는 대리전의 한 모퉁이에서 피를 흘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비치듯 미끄러워 도리질하고 헤어져 나부끼는 두갈래 파도.』어느 시인의 마음처럼 베트남 땅을 거쳐간 50만명의 따이한은 그 아오자이와 야자나무를 잊지 못한다.우리가 두고 온 나라에는따이한이 뿌린 수많은 라이따이한이 있다.그들이 자라 성년이 됐다.전쟁이 주는 교훈은 오늘로 끝나지 않는다.
하노이에서 본 베트남은 아무리 가난해도 그들이 이룬 통일은 부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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