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story] 현대차 ‘인도 진출’11년 … 차 만드는 일보다 힘들었던‘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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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인도 첸나이 제2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왼쪽에서 둘째)이 현지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오케이(OK)’할 때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들이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라 할 때는 ‘문제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 말을 이해한다. 그뿐이다’라는 의미다.

11억 인구의 거대 시장으로 잠재력을 드러내고 있는 인도 시장.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우리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다. 그래서 인도에서 비즈니스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그런 인도 비즈니스의 성공 모델로 현대자동차가 꼽힌다. 현대차는 1998년 인도 남부의 첸나이 지역에서 제1공장을 가동한 데 이어 최근 연간 30만 대의 소형차를 생산할 수 있는 제2공장을 준공하면서 총 60만 대 생산 규모를 갖췄다. 99년 이래 줄곧 인도 내 판매 2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차도 인도 진출 초기에는 숱한 문화 충돌을 겪어야 했다.

“현지 직원의 딱한 사정 얘기를 듣고 임금을 미리 줬더니 상당수가 그다음엔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우린 사실과 다르게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이들은 상대방의 피해가 없으면 단순한 속임수로 여긴다.”

96년부터 7년여를 인도 첸나이에서 일한 현대차 박승호 부장의 말이다. 그는 “영국 식민통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임금을 한 푼이라도 더 주는 직장이 있으면 두말하지 않고 떠나는 바람에 큰 애를 먹었다”고 술회했다. 워낙 이직을 많이 해 월급을 준 다음 날이면 인도 근로자 집을 돌아다니면서 작업라인으로 복귀시키는 게 한국인 관리자들의 주 업무였단다.

뉴델리에서 신발공장을 운영했다는 정모씨는 “100명의 근로자가 필요하면 일단 300명을 뽑아서 시작해야 몇 달 뒤 100여 명이 남는다”고 말했다. 2003년부터 2년간 첸나이에서 근무한 오토넷 권선정 차장은 “평생직장의 개념이나 애사심이 희박하고 금전적인 이익에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했다.

대표적인 문화적 차이가 손을 사용해 밥을 비벼 먹는 습관. 현대차는 초기에 직원식당에 포크와 스푼을 비치했지만, 아무도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인도 근로자들에게 “손톱 밑에 기름때가 끼어 있어 위생상 좋지 않다”고 숱하게 얘기했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여성 직원에게 유니폼을 입히지도 못했다. 인도 여성들이 몸에 두르고 다니는 6m 길이의 ‘사리’가 작업라인에서 거치적거린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나 ‘전통’을 뒤엎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대차가 인도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현지화 때문이었다. 상트로를 위시한 소형차 위주의 생산, 최신 기술을 적용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 70% 이상인 부품의 현지 조달률 등이 그 예다. 무더위와 열악한 도로 사정을 감안해 에어컨과 브레이크의 성능을 높였다. 차체를 높게 하고 서스펜션을 강화하며, 클랙슨의 내구성을 보강하는 노력도 더해졌다.

현지화 노력은 공장에서도 이뤄졌다. 조립라인 한쪽에는 힌두교의 상징물과 현대차 그룹의 경영전략을 나란히 배치했다. 현대차는 또 인도인의 체형이나 생활 습관을 분석하는 연구개발센터를 현지에 가동하기도 했다.

소속감을 불어넣기 위해 인도 근로자 수백 명을 경기 남양연구소에서 두 달씩 합숙시키며 기술을 전수했다. 그 결과 이직률은 점차 낮아졌고, 안정적인 라인 가동이 가능했다. 현재 인도공장에는 1만여 명의 인도인들이 일하고 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이달 초 제2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인도 근로자들은 시키는 일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은 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첸나이(인도)=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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