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화장] 바비인형은 어디 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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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참, 무슨 옷을 입고 나가지?”

벌써 한 시간째, 약속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나는 옷장을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두 시에 인사동에서 만나자는 남자친구의 전화에 마음이 더 급해졌다. 결국 나는 살금살금 외출 중인 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에 두고 있던 분홍 원피스를 슬쩍 꺼내 입었다. 준비를 마치고 나가다 신발장에 있는 전신거울을 보았다. 원피스는 여성스러운데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잣이 빠진 식혜처럼 밋밋했다. 대학 신입생이라 화장에 서툰 나였지만 첫 데이트에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언니의 화장대 앞에 앉았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 발그레한 볼, 바비인형 같은 속눈썹, 앵두 같은 입술. 화장을 마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집을 나섰다.

고대하던 만남. 우리는 인사동 쌈짓길을 걸으며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다. 남자친구에게 푹 빠져버린 나는 모든 게 좋기만 했다. 시간은 금방 흘러 밤이 늦었다. 그가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귀가 데드라인’ 10분을 남겨두고 집 앞에 도착했다. 헤어지기 아쉬웠다. 남자친구는 “구슬아 넌 화장 안 한 모습이 더 예뻐” 라는 말을 남기며 내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부끄러웠던 나는 후다닥 아파트로 뛰어 들어갔다. 기분이 날아갈 듯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황홀한 기분은 잠시,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모습에 나는 기겁을 했다. 아이라인이 다 번져 판다가 되어버린 눈, 파우더가 뭉쳐서 하얗게 뜬 얼굴이 마치 경극 배우 같았다. 아까 보았던 바비인형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내내 데이트를 했다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보자인 나는 가끔씩 메이크업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언니는 고소하다며 나를 호되게 혼냈다. 혼자 서러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어느덧 대학생 3학년이 되었다. 이제는 솜씨가 많이 좋아져 친구들의 소개팅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메이크업을 봐준다. 그 남자친구와는 예쁜 사랑을 키워가고 있다. 요즘은 한 듯 안 한 듯한 ‘물광 메이크업’을 하니 남자친구가 더 좋아한다. 박구슬(23·대학생·서울시 강서구 등촌3동)

3월 14일자 주제는 스팸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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