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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터줏대감>서울 중부시장 대아물산 李天相사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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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 오장동의 중부시장.오징어.멸치.명태에서부터 김.미역 등해조류에 이르기까지 말린 해산물이라면 없는게 없다.
한때 건어물전문시장으로서의 중부시장의 명성은 대단했다.8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전국의 건어물은 일단 이곳에 집결된 다음 각지방으로 팔려나간 까닭이다.지금은 교통.통신의 발달로 지방상인들도 산지와 직거래함으로써 빛이 많이 바랬지만 아직도 건어물에관한한 전국 최대 시장으로서 중부시장의 위상은 변함이 없다.오래 시장을 지켜온 토박이 상인들이 터줏대감으로 버티고 있는 덕택이기도 하다.
대아물산 이천상(李天相.47)사장도 그런 터줏대감의 한 사람이다.그는 22년동안 이곳을 거점으로 오징어장사만 했다.중부시장 상인들은 각자 전문품목이 있는데 그는 이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오징어가 전공이다.오징어에 관한한 「도가 트인」경지에 이르렀고 돈도 꽤 만지게됐다.그러나 동료상인들에 따르면 그는 돈만들기에만 골몰하지 않고 시장사람들의 공동관심사에 발벗고 나섰다.
그가 중부시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73년.군에서 제대하고1년정도 지났을때다.『노량진의 달동네에서 조그마한 싸전을 하는부모의 4남3녀중 넷째로 태어나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군에 갔다왔는데 기술이 없으니 마땅히 할일이 있어야지요 .』 그래서 제대후 1년가까이 이곳저곳 공사판을 떠돌면서 막노동을 하다가 「흘러들어온 데」가 중부시장이다.
『지금은 주인이 바뀐 천일상회의 점원으로 들어갔는데,오징어장사를 배우니 재미가 있어 열심히 했지요.고객에게 친절해야 하고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용은 지켜야 한다는등 상인으로서의 철칙을이때 익혔습니다.』 2년간 점원생활후 75년 독립했다.당시돈으로 30만원짜리 가게를 얻었다.막노동하면서 번 돈과 점원으로 일할때 받은 봉급(월 1만원)을 거의 안쓰고 저축한 덕택에 가능했다.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했다.혼자서 속초.주문진.묵호 등오징어산지를 왕래하면서 생산자와 거래를 트고 신용을 쌓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중부시장 고참들의 견제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겸손한 자세와 신용을 지킴으로써 생산지 거래처나중부시장 고참들에게 신뢰를 쌓아갔다.중부시장에서 오징어를 취급하는 사람들의 친목단체인 건오동심회에서 총무를 맡았을 때는 모임의 공사간 궂은 일은 도맡아했다.고객인 지방 도소매상들에게는흉어로 오징어 품귀현상이 일어나더라도 약속한 물량을 오르지 않은 값에 확보해줌으로써 신뢰를 쌓아갔다.이런식으로 한10년 하다보니 오징어상인으로 완전히 자리잡을수 있게됐다.이때쯤 큰 시련이 찾아왔다.
『85년입니다.서울시에서 가락시장을 개설하고는 중부시장사람들이 산지에서 직접 물건을 떼어오지 못하게 하고 가락시장에서 경매되는 것을 사와서 팔라는 것이었지요.중간유통과정을 하나 더 만들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지방상인들이 모 두 가락시장으로 가고 중부시장으로 올 이유가 없게되는 겁니다.중부시장은 사그라질수 밖에 없게 됐지요.』 자칫하다간 삶의 터전이 없어지게 돼 李사장은 「할수 없이」 상권수호를 위해 중부시장상인연합회를 결성,총무일을 맡아 서울시와 싸웠다고 한다.3년을 버티면서 종전처럼 바로 산지에서 구입할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해 결국 관철시켰다.
이제 「대아물산 李사장」하면 중부시장안에서는 물론이고 적어도서울.경기지방의 오징어상인사이에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동안 모은 재산이 얼마되느냐는 질문에 먹고 살만큼 벌었다고만 했다.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했더니 『지금 살고 있는 잠실의 단독주택과 은행예금이 좀 있는 정도』란다.부동산 투자에 대해서는『사회적으로 문제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면서 웃고는 그만 물어달라고 했다.
『중부시장이 오늘의 내가 있도록 해줬으니 이제는 시장을 위해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지요』라며 웃는 그의 모습에서는 학연.지연 없이 몸으로 거친 시장에서 자신의 성(城)을 쌓은 사람다운 여유가 배어 있었다.
글:柳秦權기자 사진:金相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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