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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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과 일본의 오랜 관계사를 상징하는듯한 아이였다.
종손 아기의 증조 할아버지는 독립운동하다 잡혀 감옥에서 돌아갔다.할아버지는 그 증조 할아버지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일본을넘나들어 무진 고생하며 돈을 벌었다.그리고 아버지는 증조 할아버지의 자취를 사진으로 담기 위해 일본 곳곳을 집념처럼 다니다교포 여성과 결혼,종손 아기를 낳았다.한국에 돌아가 살아야겠다고 늘 경(經)외듯 했는데 느닷없이 재앙을 만난 것이다.지진은일본의 상징같은 것이기도 했다.
증조 할아버지 대(代)부터 이어져 온 일본과의 수렁같은 길 끝에 종손 아기는 앉아 있다.이 아이를 한국에 데려온다는 것은한 집안의 대 이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1세기에 걸친 수렁의한 끝을 내 손으로 매듭짓는 일이다….
길례는 스스로 명분을 찾고 있었다.자기 성취를 위한 뒤늦은 출발조차 중도에서 포기해야 하는 길갈피에선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경주서 사온 자수정(紫水晶)알 세 개를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엄지 손톱 크기와 새끼 손톱 크기의 말간 보랏빛.
『어머,예뻐라! 웬 자수정이에요?』 연옥이 탄성을 올렸다.
『경주서 산 거야.』 고분공원 건너 상가의 후미진 골목안엔 수정알 가공 작업장이 있었다.가게를 겸한 작업장이었다.
아들과 점심을 들고 나오다 멈춰 섰다.
반으로 쪼갠 커다란 자수정 원석이 가게머리에 놓여 있어 길례의 눈을 끈 것이다.한아름이나 되는 자수정 바위였다.
도톨도톨한 잿빛 바위 껍질 안에 보랏빛 결정(結晶)이 가득히채워져 있었다.거대한 보라 과일.안쪽으로 갈수록 흑수선처럼 진한 빛이다.
수정이란 이런 모양으로 땅 안에 잉태되는 것인가.그 풍요감이길례를 감동시켰다.
가게 안은 여러가지 수정알로 채워져 있었다.
연보라에서 깜장보라까지 자수정의 보랏빛도 다양했지만,흑갈색의연수정(煙水晶)이며 연초록의 풀잎수정,말간 샘물 같은 백수정(白水晶)에 이르기까지 투명한 빛을 고루 뿜고 있다.
새끼 손톱 크기의 알 두 개와 엄지손톱 크기의 것 한 알을 골라 샀다.의아스러울 정도로 값이 쌌다.
경주는 수정의 명산지다.가공되지 않은 물건의 산지값은 이렇게도 싼 것인가 싶어 길례는 또 한번 감동했다.
자수정은 2월의 탄생석(誕生石)이다.
2월생인 연옥과 그의 배필에게 짝반지를 만들어 하나씩 나눠 줄 작정으로 산 것이다.
나머지 한 알은 길례 자신을 위해 샀는데 종손 아기 외할머니에게 선물하리라 갑자기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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