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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성조기 OK, 태극기 No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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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것은 도이칠란트제(製)고, 저것은 스위스제입니다. 남쪽에서도 비싼 기계입니까?”

26일 평양 양각도 호텔의 연회장에서 일하는 한 청년이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에스프레소 기계를 가리켰다. 25~27일 뉴욕 필하모닉 단원들의 식사와 만찬 장소로 쓰인 곳이다. “기계가 새것처럼 보인다”고 했더니 “이번에 손님들 위해 새로 들여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평양에 온 뉴요커들은 아침마다 커피 기계 앞에 길게 줄을 섰고, 더블 에스프레소를 즐겼다.

평양은 이번 공연에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130여 명의 외신기자를 위한 프레스센터를 마련, 초고속 인터넷도 설치했다. 들고 온 컴퓨터로 서울에서와 똑같은 일을 평양에서도 할 수 있었다. 회사와 메신저로 상황을 주고받기도 했다. 설비는 APTN(AP Television News, AP통신의 비디오 부문)이 맡았다.

“하루에 사진을 몇 장이나 보낼 수 있겠느냐”며 뉴욕 필 대변인에게 묻던 각국 기자들은 기사를 편안하게 송고했다. 컴퓨터 기술자가 24시간 기자들의 고충을 해결해줬다. 또 언제든지 커피와 차(茶)를 ‘테이크 아웃’, 또는 ‘이동 봉사’로 마실 수 있도록 지원했다.

2년 반 전 한 대북지원 민간단체와 함께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오후 7~8시가 넘으면 가로등이 꺼져 컴컴했던 평양 거리도 이번에는 꽤 밝았다. 북한 측 관계자는 “국가 대 국가의 행사인데 예전과 같아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미국 국가가 평양 도심에 울려 퍼지고, 성조기와 인공기가 한 무대에 게양된 역사적 이벤트를 십분 이해하는 모양새였다.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뉴욕 필 단원들은 입국심사대도 바로 통과했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작성한 입국신고서를 주머니에 구겨넣고 평양 시내로 들어왔다. 북한 측은 최대한 호의를 베풀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뒷맛은 씁쓸했다. 평양 한복판에 연주된 미국 국가가 북한 전역에 생중계된 그날, 북한은 다음달 26일 평양에서 열릴 월드컵 남북한 예선전에 태극기와 애국가를 불허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말이다. ‘성조기는 OK? 태극기는 No?’ 문화와 스포츠를 정치적 계산에 이용하는 북한의 이중 잣대가 도마에 올랐다. 우리는 2002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2005년 전주 동아시아축구대회에서 북한의 국가와 인공기를 허용한 적이 있다. 북한이 주창해온 ‘우리 민족끼리’는 구두선일까. 아니면 그만큼 미국이 센 걸까.

김호정 문화부문 기자 <평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