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14.하와이 한인 기독교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이박사는 친미(親美)외교노선을 고수했던 정치가로 널리 알려져있다.그러나 그는 맹목적인 친미주의자는 아니었다.해방후 그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 반대한 나머지 미군정의 최고책임자 하지 중장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일이라든가,6.25 전쟁때 미국이한국측의 주장을 무시하고 휴전을 성립시키려 하자 유엔군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 사실 등은 너무나 유명하다.미국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반골(反骨)적 행동 때문에 이박사는 종종 워싱턴 관가에서「골치 아 픈 반미(反美)주의자」로 백안시당했던 것이다.그런데 이승만이 콧대 높은 미국에 대해 자신의「오기」를 처음으로 드러내 보인 것은 하와이 망명시절 그가미국 감리교선교부에 반발해 독자적인 민족교회를 출범시킨 때였다. 이미 밝힌 대로 이승만은 1899년 한성감옥에서 기독교에 귀의했다.그러나 그가 정작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6년후 미국유학 초기다.1905년 부활절(4월23일)에 그는 워싱턴 DC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소문난 장로 교 교회인커버넌트 장로교회의 햄린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그렇지만 원래 감리교계 미션학교인 배재학당을 졸업한 탓으로 그후 그는 줄곧 감리교회에 적을 두고 감리교 교인으로 행세했다.1912년서울YMCA의 일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망명할 때도 그는 국제감리교대회의 한국 평신도대표 자격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교적(敎籍)배경 때문에 그는 1913년초 하와이에 정착했을 때 하와이 감리교선교부의 미국인 책임자들과 손잡고자신의 포부를 펼쳐 나가게 되었다.하와이지역 감리교선교부의 감리사 와드먼은 애당초 이승만에게 호감을 갖고 있 던 터라 이승만에게「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뿐만 아니라 감리교 하와이지방회의교육분과위원장직도 맡겨「한인감리교회」 일에 관여시켰다.
그러나 1914년 와드먼이 해임되고 그 후임으로 프라이가 부임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프라이는 이승만에게 한인감리교회 일에서 손을 떼고 학교일에만 전념하기를 당부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선교부의 친일(親日)적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이승만은 프라이 감독이 자신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태도를 나타내자 드디어이에 반발해 단호히 대응했다.즉 그는 1915년6월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과 감리교지방회 교육분과위원장직을 내 놓았다.이로써그는 미국 감리교선교부와 완전히 결별해 버린 것이다.고립무원(孤立無援)지경에 놓여 있던 망명객 이승만이 내린 이때의 결단은오랫동안 정신적.물질적으로 자기생명을 지탱해 준 탯줄을 스스로끊는 격이라 웬만한 자신감과 용 기 없이는 불가능한 용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감리교선교부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온 이승만은「직업적 교역자」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한때 교회출석을 기피하고 혼자서 기도하기를 즐겼다.그러나 얼마후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각 지방 동포를 심방하면서 한인학교와 교회의 자립을 역설했다.
그 결과 그의 자립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릴리하에 있는「여학생기숙사」에 모여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1918년7월29일 호놀룰루에「신립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그 후 이 집단은 1918년12월23일 평신도회를 열고 교회의 명칭을「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면서 이승만이 중심이 된 새로운 민족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1918년 발족한 한인기독교회는 어느 기성교파와도 관련이 없는 자치교회로 그 제도는 미국 회중(會衆)교회의 모범을 따른 점-즉 평신도 위주의 민주주의적 원칙을 따른 점-에 특색이 있었다.장로와 집사가 없는 이 교회에서의 치리(治理 )는「창립자」내지「선교부장」이라고 불린 이승만 중심의 이사원(理事院)에서 담당했다.
한인기독교회에 속한 예배당은 호눌룰루 이외에 와히아와.힐로.
파아아 등의 섬에 흩어져 있었고 1936년에는 미주 본토 로스앤젤레스에도 한인기독교회가 설립됐다.1938년 현재 한인기독교회의 세례교인수는 1천2백63명이었다.
이 교회는 이승만이 주동이 되어 창립한 교회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3.1운동 이후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이 교회의 지도자중 민찬호(閔燦鎬).장붕(張鵬)등 목사와 안현경(安玄卿). 이원순(李元淳).김유순 등 이사는 상해임시정부.대한인국민회,혹은 동지회의 핵심멤버로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한인기독교회는 처음에는 일정한 예배당건물이 없이 출발했다.
1922년11월 스쿨街에 자그마한 예배당을 마련했지만 이것 역시 1928년 예배당확장을 목적으로 방매(放賣)했기 때문에 그후 10년 동안「신흥국어학교」교실에서 예배를 드렸 다.1938년4월24일에야 이 교회는 릴리하街에 서울의 광화문을 본뜬 커다란 예배당(건평 4천2백50평방척)을 낙성시킬 수 있었다.
한인기독교회의 역사적 의의를 자리매김할 때 흔히 이승만이 자기이익 위주의 교회를 창립함으로써 하와이 한인 개신교신앙공동체를 분열시켰다고 지적하는 데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시각을 달리해 살펴보면 이 교회는 망명객 이승만이 스 스로 미국인선교부의 보호망에서 벗어나 한국인 자력으로 출범시킨 해외 최초의 민족교회였다는 점에서 한국개신교 역사상 특기할 만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