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홍세화著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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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 마디로 징한 책이었다.이 글을 쓰면서 나는 예전에 했던 맹세를 깨뜨려야 하는데서 오는 곤혹스러움을 감출 길 없다.이유인즉 처음 창작과 비평사의 주간으로부터 이 책을 건네받았을 때안 표지에 실린 저자의 얼굴을 보곤 내심 『이건 절대로 읽지 말아야지』다짐했던 터이다.
이처럼 나중에 다 내게 와 「짐」이 될 섣부른 다짐을 하게 만든 것은 그의 순결한 표정이었다.마흔을 넘긴 사람에게선 기대하기 힘든,너무도 맑은 눈빛에 나도 모르게 그만 질려버렸던 것이다.그런 눈빛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내려,아니 받아내려 했다니 얼마나 대책없고 청승맞은 사연이 굽이굽이 숨어 있을까….
나는 미처 책을 펼치기도 전에 마음이 아팠고,그리고 더이상 아프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 책,그 사람 홍세화(洪世和)와의 만남에서 예상되는 고통에의 동참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탓이다.더군다나 내겐 친정이나 다름없는 출판사에서 나온 신간에 대해 신문지면에 언급하는 것은 너무「속보이는 짓」이 아닌가.
그래서 그 책은 내방 어딘가에 한참을 처박혀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잠 못이루는 불면의 밤이었던 것 같다.나는 순전히 수면제 대용으로 볼거리를 찾다가『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기 시작했다.그리곤 밤을 홀딱 새울 정도로 그 세계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본의 아니게 낯선 타국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이 땅 지식인의 고단한 삶의 기록이다.그 부서지고 일그러진 생(生)의 조각들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그리고 당신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나는 그를 통해 십여년의 세월을 건너뛰 어 내 자신청춘의 이쪽과 저쪽을 엿볼 수 있었다.마치 어느 환장할 봄날,기억의 서랍장들이 한꺼번에 달그락거리며 열리듯이 말이다.저자는자신의 책을 이름없는 모든 작은 새들에게 바친다고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그 속엔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진진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무엇보다도 나를 부끄럽게 만든 것은 우리가 아직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는 박정희(朴正熙)정권 말기에 군사독재를 무너뜨리자는 삐라를 뿌렸다는 것 ■엔 별로(?) 한 일이 없는데도 20년 넘게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이건 말도 안된다.그러나 바로그 말도 안되는 법(法)이 통하는 곳이 우리 사회다.『당신들은사람들도 아니네요.당신 나라의 야당은 그럼 무엇을 하나요? 교회는? 노동조합은? 그리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요』라는 어느 파리 여인의 항변이 새삼스레 여겨지는 건 왜 일까.
그리고 파리의 창녀가 서울의 여류시인보다 자존심을 지키며 산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 또한 이 책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그 이유는 책을 끝까지 통독하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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