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거나 무너져야 돌아볼 것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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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07면

비명 소리도 없이 사라져간 문화재가 한둘일까. 멀리 갈 것도 없이 6·25 뒤 50여 년만 헤아려도 가늠할 수가 없을뿐더러 그 정확한 기록조차 없다.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문화유산은 그 원인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발굴 실수 ▶화재 소실 ▶개발 논리 ▶보존처리 실수 ▶방화가 그것이다. 이 중 개발 논리에 밀려난 ‘환구단’ 정문의 예를 추적해 본다.

-40여 년간 호텔 출입구로 쓰인 환구단 정문

‘환구단’, 일명 ‘천제단’이라고 하는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둥근 단으로 된 제천단(祭天檀)을 말한다. 예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를 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다. 황제가 정결한 곳에 제천단을 쌓고 기원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이미 고대 이전부터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경우 천손족인 환웅은 하늘의 권리를 명 받아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 하늘에 맹세하는 의식에서 영고탑을 쌓고 천제를 드리는 때에서 비롯되어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왔다. 성종 2년(983) 정월에 황제가 원구단에 풍년기원제를 드렸다는 사실을『고려사』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는데 태조 7년(1398) 4월 가뭄이 심할 때 종묘(宗廟)·사직(社稷)·원단(圓檀)과 여러 용추(龍湫)에 비를 빌었다는 기록과 세조 때에도 환구단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원구단의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역성혁명을 하여 황권을 잡은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 중화족의 명나라에 속국임을 자처했고, 태종 때 천자가 아닌 제후국의 왕으로서 천제(天祭)를 지냄이 합당치 않아 제천단을 폐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도성 바깥에 ‘남단’을 두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남단’ 터는 현재 용산기지 내 캠프 코이너에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뒤 고종이 1897년 10월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천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달리하여 황제국이 되어 지금의 서울 소공동 해좌사향(亥坐巳向)에다 길지를 정하고 제단을 쌓아 환구에서 천제를 드리고 황제위에 올랐다.

이태 뒤인 1899년 환구의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板)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추존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삼고 원구 황지기 위 동남에 배천(配天)하였다.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정의 황궁우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 기단 위에는 돌난간이 돌려져 있고, 1·2층은 통층인데, 중앙에 태조의 신위(神位)가 있다. 3층에는 각 면에 3개의 창을 내었다. 건물의 양식은 익공계(翼工系)인데 청나라 영향의 장식이 많다.

1911년 2월부터 환구단의 건물과 터는 조선총독부가 관리했는데, 일제는 만행을 부려 13년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 평의 조선호텔(1914년 10월 완공)을 지었다. 그러나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두면서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조선호텔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로 일제강점기인 설립 당시는 일본식 명칭인 ‘조선 호테루’였으며, 이후 이승만 전 대통령에 의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67년 호텔이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옛 조선호텔을 헐고 다시 지으라고 명령한다. 결국 환구단 정문은 조선호텔의 재건축과 소공동 도로 확장으로 우이동의 ‘그린 파크 호텔’로 옮겨지면서 정문으로 이용되었다.

현 조선호텔은 79년 미국 웨스틴(Westin)호텔그룹의 투자관계에 따라 ‘웨스틴조선호텔’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95년 신세계가 웨스틴체인의 지분을 완전히 인수했다. 환구단 터는 호텔로 되었지만 황궁우는 현재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민족의 자존심이자 민족의 상징인 환구단의 황궁우는 접객업소인 조선호텔의 정원 조경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3년 조선호텔 측은 대한제국 때 세워진 환구단을 복원하기는 고사하고 사적지인 황궁우를 드나드는 출입문(협문)의 높이가 155cm로 관광객들이 가끔 머리를 부딪혀 다친다는 구실로 협문의 높이를 190cm로 높여 원형을 훼손했다가 필자의 지적을 받고 복원한 경력이 있다. 하늘에 제를 올리는 신성한 곳이어서 몸을 낮춰 출입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문인데 말이다.

지난해 8월 23일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신응수 선생과 송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와 필자가 함께 우이동을 찾아 환구단 정문의 현장 확인을 했다. 신응수 선생은 “궁궐 건축물 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거의 원형 그대로다. 환구단 정문이 확실하다”고 했고, 송 교수도 조심스럽게 “확인이 더 필요하지만 확신이 간다”고 했다.

환구단 정문은 정면 세 칸의 맞배지붕이다. 부재의 규모(크기)나 결구(짜 맞추기) 방식뿐 아니라 단청·홍살·주춧돌·장석(용무늬) 등의 격이 매우 훌륭해 조선 후기 궁궐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왓골은 철거 직전의 사진과 비교해 1골만 차이가 나는데 이는 지붕의 생석회(용마루 등) 등이 철거로 인해 손상되어 1골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또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봉황 문양과 용 문양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용마루에는 용두가 있으며, 잡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현재 호텔은 폐업해 다른 기업으로 넘어갔으며 인근의 버스 차고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환구단 정문 가운데 문으로 버스가 지나갈 정도다. 이렇게 방치돼 있었으니 환구단 정문의 상태는 위급한 환자 꼴이다. 곳곳에 비가 새고, 부재가 틀어져 있으며, 특히 지붕에서 물이 새기 때문에 부식이 가속하고 있다.

숭례문처럼 불에 타거나 무너져야 돌아볼 것인가.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정문 상태를 점검하고 긴급 보수를 한 뒤 현 원구단 터로 옮겨오는 일을 신속하게 진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자칫 중요한 문화재 하나가 또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했다. 역사를 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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