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있음에 대천 앞바다 새봄도 오고-소설가 이문구 5주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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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13면

명천(鳴川) 선생님! 대천 앞바다도 당신의 이름 따라 울고 있음인가. 서해 바다를 멍들게 한 것도 모자라 조상님의 넋으로 우뚝 서 우리 잘잘못 말없이 지켜봐 주시던 숭례문마저 끝내 불살라버린 가슴 가슴들도 휑하니, 철썩이며 울고 있음인가. 모든 생령들 질척이며 즐겁게 어우러지는 갯벌 같은 화합과 상생의 삶을 가꾸다 가신 소설가 명천 이문구(李文求·1941~2003). 5주기를 맞는 당신의 행장과 문학이 뿌리 뽑힌 듯 부박한 오늘 우리네 삶을 울게 만들며 못내 그립게 한다.

“한세상 고맙게 잘 살다 여한 없이 가니 내 죽거든 화장해 뿌려 아무 흔적 남기지 말라”는 유언대로 명천은 살과 뼈를 주고 여물게 한 고향 보령에서 한 줌 가루로 바람의 족속이 돼 흩날려 갔다. 그러한 무욕의 삶과 죽음은 갈가리 찢긴 사회와 인심을 한자리에 모으게 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정이 우리 사회를 죄 없이 즐겁게 어우러지게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열린 당신의 장례식은 비록 조촐했으나 우리 현대문학사, 나아가 현대사의 한 장면이었다. 해방 이후 이념을 명분으로 한 잇속에 따라 나뉘어만 가던 사회를 한 자리에 모았다. 갈린 후 서로 헐뜯거나, 잘해야 소 남의 닭 보듯이 하던 문학 4대 단체가 처음으로 한데 모여 나라의 문화훈장도 추서케 하며 삶의 근간은 어울림이라는 것을 보여 준 자리가 당신의 장례식이었다.

입으로는 툭하면 상생을 말하면서도 상극을 살아온 것이 우리 현대사다. 무리 지어 다이내믹한 힘을 모을 수 있는 상극의 현대사에 피멍 들었으면서도, 또 그 당파의 잇속에 속병 들어 죽어가면서도 당신은 의연하게 서로 어울리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갔다.

『토정비결』의 전설적 인물이자 조선조의 실천적 유학자 토정 이지함의 명유(名儒) 가문 출신인 당신은 6·25 때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부친은 물론 형제들까지 빨갱이로 몰려 대천 앞바다에 수장당하는 참상까지도 어린 나이에 바라봐야 했다. 근동에서 존경받는 유학자인 할아버지 슬하에서 한문과 동양고전을 섭렵한 당신은 김동리를 스승으로 하여 1965년 문단에 나왔다.

73년 ‘한국문학’을 창간해 편집장을 맡은 당신은 이듬해 그 편집실에서 유신철폐 운동을 위한 반정부·반독재 투쟁 문인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발기하고 간사를 맡았다. 보수 문학의 수장 김동리의 그늘에서 진보문학 단체가 싹튼 것. 이후 진보적 문예지 ‘실천문학’을 창간, 대표를 맡으며 계속 반독재 활동을 폈다.

민주화가 대세를 이루며 속속 권력이 되던 88년, 당신은 제 할일 다했다며 풍진세상의 명리를 훌훌 털고 낙향해 조선 선비의 의연함을 보였다. 10여 년간 창작에 전념했으나 99년 ‘민족문학작가회’ 이사장으로 추대돼 진보와 보수, 좌와 우 진영을 오로지 인간성과 의리로 껴안으며 활동하다 타계했다.

당신의 문학은 또 어떠했는가. 지성입네, 비판입네 하는 4·19문학, 서구이식 문학이 판치던 시대에 올곧게 풍자와 골계, 넉넉한 인심으로 우리 민족의 언어와 정서와 혼을 지켜낸 우리 문학의 왕소나무 아니었던가. 이념화와 서구 지성화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해온 우리 민생의 어우러지는 삶의 미학과 가치를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되살려놓은 게 당신의 문학이다.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한 우주적 넉넉함과 자유자재로 민생의 신산고초의 일상이 서로서로 깊이 어우러지게 하는 우리네 삶의 근간을 붙잡고 있는 게 당신의 문학이다.

그런 우리 전통의 의리 넘치는 삶과 문학만 남겨놓고 자신에 대해선 아무 기념도 말라며 당신은 바람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당신이 산화해간 관촌 솔밭에는 오늘도 인간의 정리와 의리가 그리운 추모의 발길이 삼삼오오 이어지고 있다. 그런 발걸음이 모여 이념이나 지성이 아닌, 오늘도 우리네 삶에 펄펄 살아있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정서의 민족문학을 지키기 위해 이문구의 이름으로 기념사업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러 1주기 때 각계각층 100여 명이 모여 ‘명천 이문구기념사업회’를 결성했다. 죽어서도 무욕의 삶이 되레 당신을 기념해야 하는 무상의 명분을 만든 것이다.

기념사업회는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2004년부터 1차분 3권을 시작으로 한번에 2~3권씩 2006년 9월 총 26권으로 『이문구 전집』을 완간하게 됐다. 생전에 당신이 고치고 교열까지 마친 원고로 펴낸 이 전집은 명천 문학의 결정판으로 영원히 읽히며 한국문학의 왕소나무, 한국문학촌의 당산나무가 될 것이다.

보령시는 당신의 이름으로 한국문학의 메카가 돼 전국의 문인들이 수백 명씩 찾아 들어 한국문학의 앞날을 논의하고 있다. 보령시도 이에 발맞춰 이전하는 대천 역사(驛舍)에 ‘이문구 문학관’을 지어 지역의 이름을 품위 있게 빛냄과 동시에 당신의 문학을 보전하고 기리기로 했다. 대천 앞바다가 멍든 가슴을 풀 때에 맞춰 이 사업도 추진되며 당신이 생전 갯벌같이 어우러지는 즐거운 삶에서 착안한 ‘머드 축제’와 함께 세세손손 보령의 자랑이 될 것이다.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일이든, 마치 당신의 혼이 호명이라도 한 듯 가장 적합한 분들이 “저여요” 하며 나타나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다 당신 생전의 후덕함과 문학의 깊이에서 비롯된 게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당신의 무욕의 삶이 이들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념사업에 발 벗고 나서게 하고 있을 것이다.

엊그제 대보름, 부정한 것들을 불태운 대지는 이제 파릇파릇 되살아날 것이다. 대천 앞바다도 당신의 이름으로 멍든 가슴을 풀고 새봄을 부를 것이다. 두루두루 사귀며 다 잘되게 하되 권력과 잇속을 위해 파당 짓지 않는 순정한 시대의 봄도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삶과 문학을 잊지 않고 기리는 한. 사진 장문기 기자


이경철씨는 일간지 문학전문기자를 지낸 뒤 ‘랜덤하우스코리아’ 주간으로 일합니다. ‘명천 이문구기념사업회’ 집행부위원장이며 문학박사·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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