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주에 담아 삼킨 ‘5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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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가 저문다. 영욕의 5년을 뒤로하고 24일 자정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노 대통령에게 남겨진 일정은 24일 오후의 마지막 국무회의, 그리고 오후 6시30분부터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리는 전·현직 장차관급 인사 230여 명과의 고별 만찬 정도다.

청와대 관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노 대통령은 25일 아침 ‘전(前) 대통령’이 돼 비서실과 경호실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관저를 떠난다. 어느 정부나 공과가 있지만 노 정부만큼 그게 선명할 수 있을까.

대통령 취임 직전인 2003년 2월 92%를 기록했던 국정운영 지지율이 북한의 핵실험과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지명을 놓고 논란이 거셌던 2006년 11월엔 18%까지 곤두박질쳤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록하고 평가하는 게 준엄한 역사다. 공으로 꼽을 수 있는 건 무엇보다 권위, 그리고 부패와의 단절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 검사와의 대화로 시작해 검찰·국정원 등 권력기관에 대한 장악력을 스스로 약화시켰다.

지난해 5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크리스티안 카릴 기자는 칼럼에서 “노 대통령이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을 일거에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했다. 측근 비리 의혹이 터지긴 했지만 이전 정부에 비해 그 규모와 정도는 약했다. 취임 이듬해인 2004년 3월 정치자금법·선거법·정당법을 개정하는 등 정치 개혁을 통해 선거판에서 돈의 힘을 줄였다.

한나라당조차 “진짜 할 줄은 몰랐다”고 했을 만큼 임기를 1년 남겨놓고 뚝심 있게 밀어붙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도 여론의 지지를 받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공들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역사는 노무현 정부와 그 사람들에게 참혹할 만큼 비판적이다. 축구 경기를 져도 인터넷에 ‘노무현 탓’이라는 댓글이 붙는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게 가장 분명한 증좌다.

그래서 지난해 말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씨는 “친노라고 표현돼 온 우리는 폐족(廢族·조상이 큰 죄를 지어 벼슬을 할 수 없는 자손)이다. 죄 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라고 비통해했다.

가장 큰 이유로 꼽히는 건 소통의 실패다. 노 대통령은 자수성가한 정치인이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그 믿음은 인사와 정책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노 대통령은 정치를 “승부”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런 인식은 반대파들에게 승복 아니면 저항을 강요했다. 5년 내내 대립과 갈등이 지속된 이유다. 외교에서도 이런 편 가르기는 상대 국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당정 분리와 민주당 분당으로 대표되는 뺄셈 정치를 한 것도 통치 역량을 축소시키는 데 한몫했다.

특히 노 대통령의 거친 언어에서 비롯된 소통의 실패는 정권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혔다. “대통령직 못해먹겠다”(2003년 5월), “부동산 정책 말고는 꿀릴 게 없다”(2006년 12월),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2007년 1월), “깜도 안 되는 의혹”(2007년 8월) 등의 발언은 공개될 때마다 거센 비판에 시달렸다. 임기 말 노 대통령조차 “품위있게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자탄했을 정도다. 이제 5년의 역사는 저문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22일 마지막 브리핑을 이렇게 끝맺었다.

“평가가 역사에 맡겨진다. 그 평가가 언제 시작될지, 언제 끝날지, 끝나기는 하는 것인지….”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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