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13.호놀룰루 정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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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국 유학시절 이승만(李承晩)박사는 귀국해 대학 강단에서 국제법과 서양사를 강의할 것을 꿈꾼 일이 있다.
1912년 조국을 뒤로 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날 때 그는 선교사 언더우드로부터 서울에 세워질 최초의 기독교 대학,즉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의 교수직을 제의받은 일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일제(日帝)와 타협을 거부하고 해외로 망명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대학교수가 되려던 꿈은 영원히 무산되었다.
호놀룰루에 정착한 그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하와이 여러 섬에 산재한 한국 어린이들을 모아 기독교 정신과 애국사상을 심어주는일에 혼신(渾身)의 힘을 기울였다.
이승만이 1913년 초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한인기숙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하와이 각 지방에서 온 남학생 65명에게 기숙 편의를 제공하고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승만은 1913년 9월 감리교 선교부의 와드먼 감리사로부터이 학교의 원장직을 인수받아 그 이름을「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이라 고치고 학제를 개편해 고등과.소학과.국어과및 한문과를 설치,영어등의 일반과목 외에 한글과 한문,그 리고 성서를 가르쳤다.이 학교에는 4~5명의 미국인과 3명의 한인 교사가 있었다. 이박사가 인수한 다음 전보다 명성이 높아진 이 학교에는 여러 섬에서 향학열에 불타는 여학생들이 몰려왔다.
이들을 수용하고 교육하기 위해 이승만원장은 한인교포간에 모금캠페인을 벌인 끝에 1914년 7월29일「전적으로 한인들의 성금만으로」호놀룰루 부누이 지구에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여학생기숙사를 마련하였다.
이렇듯 모든 일이 순탄하게만 보였던 1915년 6월 이승만은돌연 한인중앙학원 원장직을 사임했다.동시에 감리교에서도 탈퇴했다. 그가 이러한 결단을 내린 것은 무엇보다 1914년 초 와드먼의 후임으로 부임한 감리사 프라이와의 의견대립이 첨예화됐기때문이었다.
우선 프라이 감리사는 이승만이 학생들에게 주입코자 하는 민족주의적 교육내용(한국어와 한국사 교육)이 하와이領의 인종혼합정책에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게다가 사무 인계과정에서 프라이는 이승만이 한인중앙학원 뿐만 아니라 한인감리교회 일에 깊이 관여하면서 이 기관들의 재정까지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이승만에게 재정에서 손떼고 교육에만 주력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물론 이승만의 권한축소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발한 이승만은 하와이 각 지방을 돌면서 동포들에게 한인 학교와 교회의「자립」을 강조하고 그들에게 재정적 협조를 호소했다. 그 결과 그는 1916년 정월까지 7천7백달러에 달하는 거금을 모금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그는 1915년 7월「대한인국민회」로부터 보조받아3에이커의 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교실을 장만한 그는 1916년 3월10일「여학생 기숙사」를 확장해 독립된 여학교,즉「한인여자성경학원(韓人女子聖經學院)」을 발족시킬 수 있었다(개교 당시 이 여자학원의 등록학생수는 73명).
그후 1918년 9월 이승만은 이 여자학원을「한인기독학원(韓人基督學院)」으로 개명하면서 감리교에서 완전히 분리된 남녀공학제의 민족적 교육기관으로 만들었다.그리고 한인여자성경학원의 부지와 국민회 소유의 엠마기지를 모두 매각해 호놀룰 루 가이무기지구에 9에이커의 지단을 확보,그곳에 교실을 짓고 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이승만이 당초 구상했던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다.
학원을 확장하기 위해 이승만은 1921년 2월 가이무기 학교지단을 1만달러에 방매하고 새로이 갈리하이 계곡에 4천에이커나되는 지단을 매수,이곳을 교지로 삼고 여러가지 애로에도 불구하고 8만4천여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책정하고 새 로운 교사를 마련하였다.
한인기독학원이 설립되자 한인중앙학원의 많은 학생이 옮겨왔다.
한인기독학원은 1928년까지 기숙사제도로 운영되었으며 주로 소학교 6년과정을 이수시켰다.
학생수는 매년 80~90명 정도였으며,10년동안 이 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한 학생수는 1백50명이었다(김원용의『재미한인 50년사』참조).
이승만은 매일 있는 채플시간에 설교를 했는데 남학생에게는 「한국여자와 결혼할 것」,여학생에게는「한국남자와 결혼할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후 교포 2세들간에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또 하와이령의 공립학교제도가 발달하면서 이 학원의 인기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1928년 이후 이 학원은 때론 고아기숙을 위주로 하는 등 역경을 겪으면서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1952년 하와이 한인이민 50주년을 맞은 현지 교민들은 이승만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한인기독학원의 토지와 재산을 매각해 15만달러를 조성,인천의 용현벌에 인천(仁川)과 하와이(荷와伊)의 첫글자를 딴 이름인 인하공과대학(仁荷工科大學 )설립 기금으로 내놓았다.
이로써 망명객 이박사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설립했던 한인기독학원의 전통이 국내의 인하대학교로 연면히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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