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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난 정부청사엔 소방청도 있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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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1일 화재로 유리창이 깨지고 외벽이 그을린 정부 중앙청사 5층에서 경찰 감식반원들이 화재 원인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사진=김성룡 기자]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13층에는 국내 소방정책을 총괄하는 소방방재청이 있다. 그런 정부청사에서 21일 새벽 화재가 발생했다. 9년 전인 1999년에도 이번에 불이 난 바로 아래층이 대낮에 화염에 휩싸이면서 공문서가 불탔다. 정부는 당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특히 화재는 대한민국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불탄 지 11일밖에 지나지 않은 날 발생했다.

◇화재 무방비 정부청사=정부중앙청사에는 11개 중앙부처가 모여 있다. 근무 공무원만 3400명이다. 대한민국 행정부의 상징 건물이지만 화재 초기 진압의 필수 장치인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소방시설 설치유지법에 11층 이상 건물에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된 것은 73년. 지상 19층인 정부중앙청사는 70년 완공돼 법 적용을 받지 않았다.

정부는 그동안 수차례 스프링클러 설치를 추진했다. 최양식 행자부 제1차관은 “95년에도 설치를 검토했으나 사무실을 비우고 공사해야 해 설치를 보류했다”며 “최근에는 행정수도 이전이 예정돼 있어 예산 확보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고 말했다.

99년 청사 4층 통일부 사무실에서 선풍기 과열로 불이 났을 때도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양도석 정부청사관리소 총괄과장은 “예산 확보가 안 돼 계획이 흐지부지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부과천청사도 화재 위험에 노출돼 있다. 85년 이후 완공된 3~5동은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만 82년 지어진 1~2동은 스프링클러가 없다.

◇정부 인수인계 차질 우려=화재가 발생한 정부중앙청사 5층은 21일 하루 종일 출입이 통제됐다. 4층과 6층도 물이 고이고 잔해가 쌓여 정상업무가 불가능했다. 4~6층을 사용하는 국무조정실·행자부·통일부 직원은 다른 층이나 인근 건물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봐야 했다. 이 때문에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인수인계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4층 집무실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자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최 차관은 “지난해 온나라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정부 업무가 온라인으로 이뤄지고 백업(Back-up) 체계도 갖춰 화재로 인한 자료 손실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누전이나 전열기구 과열이 원인일 듯”=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소방서·전기안전공사는 21일 화재 원인에 대한 합동 정밀감식을 벌였다. 경찰 관계자는 “단락 흔적이 있는 전선 한 개와 불에 탄 전열기구 한 개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단락 흔적은 누전이나 외부 화재 등으로 전선이 타서 끊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기안전공사 관계자는 “청사가 70년에 지어진 낡은 건물이라 누전의 개연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전열기구 과열 등에 의한 실화 가능성도 제기된다. 화재가 발생한 503, 504호에서 마지막 근무자가 퇴근한 시각은 20일 오후 11시55분이었다. 청사관리소 담당자는 “청사 중앙난방이 오후 6시면 중단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전열기를 가져다 놓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21일 0시30분쯤 국무조정실 총무·혁신팀이 있는 503, 504호에서 발생한 화재는 502호와 505호로 번지며 9500여만원의 피해를 내고 30여 분 만에 꺼졌다. 야근 중이던 31명의 직원은 옥상으로 대피해 인명 피해는 없었다.

글=박신홍·이충형·선승혜 기자 ,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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