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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기업행 러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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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1. 인재추천업체 HR코리아의 최효진 대표는 잘나가는 의사(49) 한 사람을 지난해 만났다. 최 대표는 이직에 큰 관심이 없던 그에게 중견 제약회사 부사장 자리를 추천했다. 뜻하지 않은 제의를 받는 의사는 고민 끝에 최근 직장을 옮겼다. “새로운 영역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는 것. 지금은 경영대학원에 다니며 경영자의 자질을 다진다.

#2. 대형 회계법인에 5년째 근무하던 한 공인회계사(36)는 며칠 전 헤드헌터의 전화를 받았다. 정보통신업체 임원 자리가 어떠냐는 제안. 평소 경영전략 업무에 관심이 많던 터라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문직 종사자의 기업행이 늘고 있다. HR코리아에 따르면 의사·변호사·회계사 같은 고소득 전문직이 일반 기업체로 이동하는 숫자는 2007년에 전년 대비 34% 늘어난 것으로 추산됐다. 이 회사에 접수된 전문직 이력서도 같은 기간 25% 늘었다. 최 대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이 가시화하고 기업 인수합병이 활발해지면서 올해도 전문가 이직은 더욱 늘 것”으로 전망했다.

의사·약사의 기업행은 3년 전께부터 부쩍 늘었다. 제약사의 연구개발(R&D) 투자로 전문인력 수요가 늘어난 때문이다. 대웅제약 인력개발팀의 서동완 이사는 “신약 R&D 투자가 늘면서 유능한 전문직 영입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이 법조 출신을 선호하면서 이들의 기업행 행렬도 눈에 띈다. 기업 담합 수사통이던 윤진원 전 서울지검 형사6부장은 이달 초 SK그룹 부사장으로 변신했다. 2004년 SK로 옮긴 김준호 전 서울고검 검사는 지난해 말 SK에너지의 경영지원 담당 사장으로 승진해 전문경영인 변신의 성공 사례로 꼽혔다. 재야에 나와 회사를 차린 법조인도 있다. 이해완 전 서울지법 판사는 2000년 로앤비를 설립해 국내 최대 법률 데이터베이스 회사로 키웠다.

대기업의 인사 이동이 얼추 마무리되면서 임직원들의 이직도 활발하다. 대기업 출신 임원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실무의 달인들이라 옮기려는 직장을 보는 관점이 매우 전문적이다. 회사의 화려함보다 자신과 궁합이 맞는지 먼저 살핀다. 봉급과 직위를 올려주면 달려가는 ‘묻지마’식 이직과 다르다. 심지어 오너에게 직접 보고하는 자리인지 꼼꼼히 따진다. 잡코리아의 안현희 이사는 “중간에 다른 임원에게 보고해 자신의 기획안이 수정되는 것을 싫어한다. 또 최고경영자(CEO)의 피드백을 직접 받아야 일하는 재미를 느낀다”고 전했다.

전문 자격증이 모든 걸 보장하는 건 아니다. 얼마 전 한 외국계 기업은 CEO를 물색했다. 일류대학을 나와 박사를 하고 국내 정보기술(IT) 대기업 임원까지 지낸 사람을 구해 연봉 협상까지 마쳤다. 그런데 평판 조사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팀원의 역할 배정조차 서투르게 해 차라리 없는 게 도와주는 것”이란 혹평을 들은 것이다.

정선구·박현영·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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