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관현악단 뉴욕 아닌 런던서 공연 성사 가능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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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 나가에 세스치나 백작부인(오른쪽)이 세계적 지휘자 주빈 메타(가운데),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던 북한과 미국. 양국이 만국 공통어인 음악을 매개로 가까워질 조짐이다.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평양 초청공연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공연은 어떻게 성사된 것일까? 그 전모를 추적했다.

미국의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오는 26일 북한 평양에서 공연을 갖는다. 19일 발매한 '월간중앙' 3월호에 따르면 이 공연을 후원한 사람은 일본계 이탈리아인 요코 세스치나 백작부인이라고 한다. 이하 내용은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요코 세스치나의 정체와 뉴욕필 평양 공연의 전모에 대해 월간중앙이 밝힌 기사 내용 전문.

2월26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곳. 다름 아닌 북한 평양의 동평양대극장이다. 세계적 명지휘자인 로린 마젤(78)의 지휘 아래 미국의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뉴욕필)가 이날 저녁 6시부터 7시30분까지 공연을 갖는다. 실제로 이 공연은 한국은 물론 미국·프랑스·독일 등에 TV로 생중계된다. 두말 할 나위 없는 세계적 이벤트다.

그런데 북한의 뉴욕필 초청 비용은 누가 댔을까? 최근까지도 베일에 가려 있던 그 주인공이 요코 나가에 세스치나(75) 백작부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이 여성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일본계 이탈리아인이다.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과 교도(共同)통신 등에 따르면 그는 일본 구마모토(熊本)현 태생으로 도쿄(東京)대를 졸업한 재원이라고 한다. 전후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1960년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리고 2년 후 베네치아에서 하프를 전공하던 요코 백작부인은 운명의 남자인 렌조 세스치나 백작을 만났다.

세스치나 백작은 밀라노 출신의 거상으로 요코 백작부인과 무려 15년에 걸친 열애 끝에 1977년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인 세스치나 백작은 1982년 사망했고, 그는 이른 미망인이 됐다.

문제는 이후에 닥쳤다. 요코 백작부인은 남편이 남긴 유산을 둘러싸고 남편의 친족들과 많은 불화를 겪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물려받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자선사업의 일환으로 찾은 것이 자신의 전공이기도 한 음악계에 대한 후원이었다. 요코 백작부인은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음악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발레리 게르기예프(55),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인 막심 벤게로프(34) 등이 있다.

뿐만 아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 카네기 홀 등도 그의 재정 후원 대상이라고 한다. 그런 요코 백작부인이기에 이번 뉴욕필의 평양 공연을 후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김계관 외무상이 크리스토퍼 힐 접촉

시간을 조금 거술러 올라가 보자. 월간중앙이 이번에 공연을 갖게 될 뉴욕필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 중순께부터. 한 대북 소식통으로부터 “북한이 뉴욕필 평양 초청공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제보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북전문가 A씨는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중국에서 만난 북한의 한 고위층이 뉴욕필의 평양공연을 추진 중인데 꼭 성사시키고 싶다며 애착을 보이고 있다. 실내공연 1회, 실외공연 1회 등 2차례. 비용은 각 100만 달러로 200만 달러가 든다고 한다. 급박하게 일정을 잡는 데 따른 ‘급행료’를 포함한 금액이다. 문제는 6자회담 트집으로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궁지에 몰려 후원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결국 한국 기업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초청 비용이 마련돼도 쉽지 않은 판에 돈을 구할 재간이 없으니 상황은 난망하기만 했다. 성사되기만 하면 분명 세계적 이벤트로 기록될 뉴욕필 평양 초청공연은 힘을 잃는 듯했다.

그런데 며칠 후 국내 한 일간지가 바로 이 이야기를 보도했다. 그리고 곧장 공론화하고 뉴욕필 내부의 갈등 소식이 흘러나오나 싶더니 공연 일정이 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잘 알려져 있듯 뉴욕필은 전 세계를 주유하며 연주하는 세계적 오케스트라다. 당연히 1년, 아니 몇 년치 공연 일정이 늘 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아무리 뜻깊은 행사라고 해도 갑작스럽게 일정을 변경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급기야 대미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의 김계관(65) 외무상이 크리스토퍼 힐(56)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힐이 과연 뉴욕필을 움직을 수 있었을까? 가뜩이나 초청비용조차 없는 마당에….

북한은 미국 내에서 이 사연을 행정부 고위층과 뉴욕필에 전할 수 있는 모든 라인을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돈을 댈 수 있는 남한 기업이나 단체를 적극 수소문했다.
다시 A씨 말.

“모두 난색을 표했다. 기업으로서는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 미국이나 제3국 경협사업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는 뉴욕필의 일정을 급히 바꾸는 것이 어렵고….”

물론 북한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감복했는지 뉴욕필도 이후 후원자를 찾는 데 힘을 썼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뉴욕필이 요코 나가에 세스치나를 이번 공연의 후원자로 나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요코 백작부인은 이번 공연의 재정적 후원에 대해 오해를 살까 봐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일본과 북한 사이에 정식 국교가 없는 데다, 지난해 여름 뉴욕필로부터 후원 의뢰가 들어왔을 당시 일본의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북한 공작원에 의한 일본인 납북문제가 연일 일본 매스컴에 오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북·일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된 시기에 그런 요청이 들어온 셈이었다.
이와 관련해 요코 백작부인은 한 인터뷰에서 “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이번 후원을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에 평양 공연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뉴욕필 간청으로 요코 백작부인 마음 움직여

그는 또 이런 발언도 했다.

“나는 정치를 모른다. 하지만 음악은 세계 만국 공통어다. 이번 공연으로 인해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그만이 이번 공연의 후원자는 아니다. 직접적인 재정 후원은 아니지만 뉴욕필 평양 공연의 협찬사로 나선 국내 방송사와 항공사가 있었다. 이번 공연을 국내에 생중계할 MBC와 뉴욕필 단원들의 베이징~평양, 평양~인천 간 교통편을 제공할 아시아나항공 역시 공식 협찬사로 올라 있다.

하지만 MBC가 방송권을 산 것은 뉴욕필이 아니다. 뉴욕필은 평양 초청공연의 연출권과 방송권을 클래식 음반 발매로 유명한 ‘유로아츠 뮤직 인터내셔널’에 팔았기 때문이다.

MBC가 이번 공연을 생중계하기 위해 약 5억 원을 유로아츠에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 평양 공연 생중계를 담당하는 방송국은 북한의 조선중앙TV, 미국의 채널13, 프랑스·독일 합자 방송사인 아르떼다. 북한과 미국의 경우 MBC의 전파를 받아 방송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뉴욕필 평양 초청공연의 계약 주체는 어디일까? 당연히 한쪽은 뉴욕필일 터. 북한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조선문학예술인총동맹이 계약의 주체로 기록돼 있다.

공연이 끝나고 30분 후에는 만찬이 이어질 예정이다. 이 대목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공연과 만찬에 과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나오느냐 여부다. 최근 대북 소식통들의 전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 건강 악화로 외부 활동을 자주 하지 않는다고 하니 관심은 더하다.

만일 김정일 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런 ‘와병설’도 일축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북 전문가들은 그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다. 뉴욕필은 평양 공연을 마치고 2월27일 서울로 향한다.

아시아나항공이 마련한 특별기를 이용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뉴욕필 단원들은 서울 강남의 JW메리어트호텔에 묵은 뒤 다음날인 28일 서울에서 한 차례 더 공연한다.

이렇듯 뉴욕필의 평양 공연은 추진 초기에 언제 있었느냐는 듯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이 하나 있다. 지난해 8월 대북 전문가 A씨가 전한 평양국립관현악단과 관련한 이야기다.

“뉴욕필과 평양국립관현악단의 교차 방문 공연까지 염두에 두고 김계관이 접근했다.”

그런데 이런 A씨의 보고와 달리 현재 평양국립관현악단과 관련한 소식은 그 어디에서도 듣기 힘들다. 그런데 마침 영국에서 횔동하며 북한과 연관을 맺고 있는 한 관계자는 “평양국립관현악단이 조만간 영국의 런던에서 공연할 것”이라고 전했다.

평양국립관현악단, 뉴욕 아닌 런던으로?

뉴욕필 평양 공연에 이어지는 평양국립관현악단의 런던 공연! 머리를 갸우뚱하게 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마리는 뉴욕필 초청공연의 후원자인 요코 백작부인에게 있는 듯하다.

이번 뉴욕필의 평양 공연에는 요코 백작부인이 동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그가 평양국립관현악단을 절차상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미국 대신 영국으로 초청하기로 결정했을 공산이 크다는 것.

아무튼 이번 공연에 대한 세계인의 기대는 크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얼어붙은 북·미관계의 해빙을 가져올 절호의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평양대극장을 가득 메울 뉴욕필의 하모니는 그 만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뉴욕필의 이번 평양 공연은 과연 한반도 평화를 향한 신호탄이 될 것인가?

김상진 월간중앙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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