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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을사늑약 원천 무효” 밀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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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고종 황제의 외교 발자취를 입증하는 사료다.”

고종의 친서를 연구해온 서울대 이태진(국사학·사진) 교수는 고종이 을사늑약 이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교수는 ‘고종의 밀서가 1906년 1월 30일로 예정된 일제의 통감부 설치를 앞두고 구국을 위한 외교 노력을 펼쳤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을사늑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한 고종의 친서는 ▶1906년 1월 29일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왜 독일 황제에게 보냈나.

“황제 어새가 찍힌 이 친서는 1906년 1월 유럽 각국 정부에 보낸 국서와 짝을 이루는 문서다. 두 문서는 고종의 외교 노력이 입체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서에서 고종은 일제의 강점을 피하기 위해 서구 열강의 5년 기한 공동보호도 수용하겠다는 카드를 던졌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의 수교국이었던 독일의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 지원을 호소한 것이다. 문서를 읽어보면 국권 침탈의 벼랑 끝에서 몸부림친 군주의 고뇌가 읽힌다.”

-국서에는 어떤 도장이 찍혔나.

“대한제국 황실의 공식 국새인 ‘대한국새’가 찍혀 문서의 내용이 황제의 뜻이라는 것을 공인했다.”

-어새 위에 적힌 한자는 무엇인가.

“고종의 이름이다. 경이라고 읽는다.”

-어새가 찍힌 문서의 성격은.

“어새가 찍힌 문서는 지금까지 6개가 발굴됐다. 이번에 한 건이 더 추가된 것이다. 어새는 주로 밀서에 찍혔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비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조·러 연합작전을 제안하는 등 특급 국가기밀을 다룬 문서에만 찍힌다. 어새와 함께 ‘한성에서 이경’ 또는 ‘경운궁에서 이경’ 이런 사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서도 같은 형식을 취했다.”

-또 다른 고종의 친서가 나올 가능성은.

“국서가 영국 기자에게 전달됐다는 점에서 당시 유럽 수교국이었던 프랑스·벨기에에도 친서가 보내지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는 조선 정부가 추진한 중립국의 모델이었다.” 

정용환 기자

◇을사늑약(乙巳勒約)=1905년 11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고종과 정부 대신을 위협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쌍방의 조건이 대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힘 있는 강자의 강요에 의해 체결됐기 때문에 ‘늑약’이라고 부른다.

◇헤이그 밀사 사건=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1907년 고종이 이준 열사 등에게 친서와 신임장을 주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한 사건.

[J-Hot]

▶ 고종 '을사늑약 밀서' 1906년 獨 황제에게도 보냈다

▶ 어새 위에 한자는 고종의 이름 '경'

▶ 고종의 밀서 어떻게 찾아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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