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뻘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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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뻘물’-송수권(1940~ )

이 질퍽한 뻘 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 흐드러진
페로몬 냄새 그보다는 뭉클한
이 질퍽한 뻘 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야
열 몇 살 가슴 두근거리던 때 이야기지만
들찔레 소복이 피어지던 그 언덕에서
나는 비로소 살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가 좋고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하여튼 뻘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구 소리보단
땅을 메다치는 징 소리가 좋아요

하늘로는 가지 마……
하늘로는 가지 마……
캄캄하게 저물며 뒤늦게 오는 땅 울음
그 징소리가 좋아요

저물다가 저물다가 하늘로는 못 가고
저승까진 죽어 갔다가
밤길에 쏘내기 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가 좋아요


진득진득한 남도 정서가 엉겨오는 시. 펄 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구 소리보단 땅을 메다치는 징소리가 좋다니. 그 징소리가 캄캄하게 저물며 뒤늦게 오는 땅 울음이라니. 다시는 안 올 것처럼 팩 돌아섰다가, 밤길에 소나기 맞고 찾아드는 여자라니. 고향이란 그런 것이다. 늙었다고 버리려 하지만 끝끝내 뒤늦게 오는 사랑처럼, 질퍽한 펄 내음처럼……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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