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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정신을 기억하라…새로운 문화를 꿈꾸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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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07면

그들이 품고 있는 내용이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지향점이 있기에 ‘세계의 60년대 정신’이라 할 만하다. 60년대와 같은 세계의 한 소용돌이는 인류사에서 참으로 드문 일이다. 소요와 폭동, 고통과 성취감, 거부와 도전, 새로운 문화와 ‘삶의 스타일’, 유토피아적인 집단행동들로 인간이 세상을 움직이는 주체자로서 희망에 넘쳐 있던 시기다.

젊은이들은 스스로 세상을 만든다는 적극적인 행동을 맘껏 드러냈다. 61년, 43세 젊은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며 “여기, 지금부터… 횃불은 미국의 새로운 세대에게 쥐어졌다”고 선언하며 새 시대는 시작된다. 안타깝게도 그는 임기를 못 채우고 피격됐고, 수렁으로 빠져드는 베트남전에 따른 반전운동과 함께 전통적인 사회체제는 도전을 받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폭발하는 시대의 모습을 그려내야 할까. 좌충우돌 더듬기만 하려 해도 엄두가 안 난다. 대학은 학내 문제로부터 시작해 불만에 찬 학생들의 거센 항의와 함께 점거당한다. 흑인 민권 행진과 도처의 충돌, 케네디 가문의 형제 피살,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저격 등 피가 피를 불렀다. 기성체제(establishment conformity)를 거부하는 젊은이들은 록음악과 마약 속에서 그들의 공감 표현을 몸으로 하게 된다.

마약 문제만 해도 복잡하다. 마약에 빠지는 것은 그들의 의식을 보다 정신적이게 하고 공동의 사회감을 더 긴밀하게 하려는 목적성이 있었다. 히피들이 무리를 지어 사는 일,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이 부르는 반전 노래 ‘Blowing in the Wind’가 울리는 가운데 떼로 모이는 록콘서트는 당대의 주인공들과 동료로서 행복한 체험을 나누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집단의 자기표현이 되는 것이었다. 강력한 기성사회의 보루와 맞선 ‘Flower Power’와 ‘LOVE’는 시적 상상의 표현이었으나 젊은이들에게는 강렬한 공감대였다. 40만 젊은이가 모여든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우드스톡 네이션’은 이렇게 해서 실현되었다.

Student Power, Youth Culture 또 Counterculture(대항문화, 반문화)는 개인이 Life-style과 함께 음악·패션·디자인에서 ‘유스 마켓’을 이룬다. 그들의 강력한 주장을 커뮤니케이션하는 대안 인쇄매체들이 래디컬하게 쏟아지자 순응적인 소시민 다수를 위한 개성 없는 거대 잡지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25세 미만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다. 전후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나 이제 대학생이 된 인구가 60년대 이전에 비해 2~3배로 늘어났고, 서구의 경제는 전체적으로 호황을 구가해 60년대를 지나는 동안 차량과 TV 보급률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난다.

물론 호황 한편에는 소외계층이 있었다. 학생들은 이런 사회를 인식하면서 역사적 인과와 부조리를 초월하려고 했다. 이는 근본적인(radical) 인간성의 회복 같은 것이기에 마르쿠제 같은 학자는 그 동기를 ‘Eros Effect’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간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신좌파’의 맥락에서 60년대를 설명하기도 한다.
학생들의 저항은 대학 내의 문제로부터 퍼져나가 여러 대학으로 일반화되었고 밖으로 정치화되었다. SDS(Students for Democratic Society)는 국제적인 유대를 맺으며 파리 낭테르 대학과 소르본 대학, 베를린 자유대학을 비롯해 런던과 로마, 멕시코 등 남미 여러 곳, 아프리카와 일본 도쿄에까지 영향을 끼쳐 대학생들의 폭동은 이어지고 강압 받고 때로 일정한 성취를 얻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의 대학 소요를 그린 세계지도에서는 전 지구적인 별표를 확인할 수 있다. 전자시대의 예언자로 등장한 마셜 매클루언이 전자매체가 곧 메시지 자체로, 지구 전체를 하나의 ‘글로벌 빌리지’로 만든다고 한 말이 실감난다. 이에는 60년대로 이어진 독자적인 나라마다의 분류(奔流)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역사·사회적인 것 말고도 본래의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온 젊은이의 본질적인 행태를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것도 세계 도처에서 그 연대에 같이 일어난 것이 기적 같음을 말한다. “이제껏 세계적 혁명은 단 둘뿐이다. 1848년과 1968년에 일어난 혁명은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으나 둘 다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고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한 바 있다.

인간 내면의 확장과 평화, 지각의 확대를 위한 것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비틀스가 인도의 구루를 찾은 예에서 보듯 동양적인 것이 붐을 이뤘다. 환상체험을 위한 매체로서 LSD(마리화나)는 음악판을 새롭게 전개시켰다. ‘사이키델리아’의 이미지와 옷차림들이 ‘마약(Acid) 문화’로 나타났다. 괴상한 차림에 흔히 꽃들을 달고 음악과 마약을 즐기며 무리를 진 이들이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슈버리에 다니는 것을 매스컴이 ‘히피’라고 부르게 된 것은 67년 초라고 한다.

이들의 무리는 그 거리와 해변공원에 앉아 ‘Be-in’ ‘Love-in’을 체험하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사회적인 환경에 대해 전혀 냉담한 모습들이었다. 이들 무리와 처음부터 교유한 앨런 긴즈버그는 20~30세나 위인 연장자로, 50년대 비트 시대부터 인도인 복장을 한 시인으로 살며 인간 내면의 ‘울림’을 명상해 일깨우는 시(Howl)를 읊었다. 여기 함께한 LSD의 선교자 티모시 레아리(전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가 이 히피들을 성격 지은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히피는 옛 ‘비트니크’ 소설인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On the Road)』의 딘 모리아티 모습에 방불한 것으로, 어두운 차림에 재즈에 침잠하며 몇몇 친구와 섞이면서 방황했다. 이에 비해 68년의 ‘Flower Children’은 현란한 차림을 하고 마약과 록음악 속에서 ‘사랑과 평화’의 엑스터시에 빠진다.

영국의 석학 버트런드 러셀이 베트남전의 부당함을 비난하고,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가 파리 대학 폭동으로 등장한 콩방디를 지지하고, 마르쿠제가 ‘에로스 이론’으로 젊은이의 분출을 지지하는 가운데 긴즈버그·레아리·톰 헤이든 등 나이 든 지지자들의 역할도 있었다. 67년에 혁명의 정글 속에서 사살당한 체 게바라, 반전 가수 밥 딜런과 비틀스, 지미 헨드릭스의 폭음 같은 기타 소리, 제니스 조플린의 절규, 그리고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오른 로커들의 이미지가 60년대와 함께한다.

‘우드스톡 네이션’의 40여만 군집, 거리의 반전 시위, 제리 루빈과 애비 호프먼의 재기 넘치는 언동과 활약, 흑인 인권시위(블랙팬더), 여기에 여권(女權)과 성혁명으로 이어지는 장면들, 체코의 ‘프라하의 봄’, 노동자 시위 대열로 이어진 파리의 ‘5월 혁명(바리케이드의 밤)’, 베트남 전쟁(구정 공세·미라이 참극), 멕시코에서의 반란과 정부군의 무차별 토벌, 처음 촬영된 월평선 위의 찬란한 지구, 뮤지컬 ‘HAIR’, 매클루언의 매체론, 007영화, 그리고 ‘이지 라이더’가 떠오른다. 언더그라운드 코믹스(로버트 크롬), 피터 맥스 포스터의 사이키델리아, 미니스커트의 등장과 팝아트(해프닝) 등 모두의 이미지가 60년대를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콘들이다. 이 ‘대카오스’의 요소를 묶으면 바로 ‘68년 정신’이 나온다.

1968년을 특집으로 다룬 최근 ‘Newsweek’에서 조너선 다먼 기자는 이렇게 썼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60년대 사람으로 규정하든 안 하든 60년대에 갇혀 있다. 우리 모두는 그 시대의 인질이다…. 60년대는 한시대가 지극히 중요한 문제를 놓고 일관된 주장을 견지했던 시절이었다.”


1 “새 ‘에버그린’지에 체(Che)의 정신의 살아 있다.” 미국 동부에서 발행되는 지적이고 과격한 잡지 ‘에버그린’에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67)의 일기가 처음 공개된다. “내가 패배해도 혁명은 계속된다.” 카리스마의 얼굴 체 게바라는 1950년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을 이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콩고와 남미 정글로 들어가 불을 댕겼다. 그의 얼굴은 ‘뉴 레프트’와 ‘래디컬’의 이미지로 시위 피켓과 티셔츠에 옮겨져 반체제의 영웅으로 도처에 나타나곤 했다.

2 1968년 4월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열린 흑인 민권운동 모임에서 지도자 마틴 루터 킹(1929~68) 목사의 연설을 듣고 난 흑인들이 무장한 방위군이 도열한 앞에 ‘나는 인간이다(I AM A MAN)’라고 쓴 피켓을 걸고 행진하고 있다. 이 연설을 끝으로 킹 목사는 곧 피살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I Have a Dream, 친구들이여 이 순간의 어려움과 고뇌에도 불구하고 내게 꿈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이 꿈은 미국의 꿈에 깊이 뿌리 내린 꿈입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국가적 신조의 진정한 뜻을 실천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 자식 넷이, 피부 빛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격에 따라 판단받는 날이 올 것이라는.”

3 자유발언운동(FSM)의 행동파 인물인 잭 와인버그는 “30세 이상 된 이는 아무도 믿지 마라”는 말로 유명했다. 1964년 10월 그를 체포한 경찰차가 버클리대 교내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연좌한 것을 시작으로 FSM의 리더 마리오 사비오(사진 왼쪽 앞)는 학생들에게 외쳤다. “만약 대학이 하나의 기업이고 총장이 경영자라면(당시 멀티버스티 개념에 대해) 교직원은 종업원이며 우리 학생은 생산 원료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거나 만들 수 있는 원료가 아니다. 대학의 일부 고객에게 팔리는 것으로 끝나는 원료도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존 바에즈가 ‘바람이 일고 있네’를 부르는 동안 1500여 학생이 성조기를 앞세우고 본관 건물로 들어간다. 곧 이어 800여 명이 강제 연행되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다. 이 버클리대 사태는 미국과 유럽 각 대학에서 벌어진 총장실 점거와 시위 등의 도화선이 된다.

4 『여성의 신비(Feminine Mystique)』(1963)를 쓴 베티 프리던(1921~2006)이 설립한 여성전국조직(NOW)은 남녀 동등권을 주장하는 ‘여성 권리장전’을 미 의회에 낸다. “여성은 늘 누구의 엄마이고, 누구의 부인이지 결코 자기 자신인 적이 없었다”며 프리던은 여성의 아이덴티티를 일깨웠다. 뉴욕 5번가에서 벌어진 여권을 위한 행진에서 참석자들은 “전 세계의 여성이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플레이보이 클럽에서 플레이보이 버니로 일하며 남성의 성적 행태를 성토하는 보고서를 썼고, 케이트 밀레트는 『성의 정치학』을 집필한다.

5 ‘HAIR’.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진 첫 록 뮤지컬로 역사에 기록됐다. 1968년 4월 관객 앞에 충격으로 다가온 무대는 남녀의 완전 누드에 힘찬 노래(‘The Age of Aquarius’), 반체제를 여실히 보여 주는 거친 대화, 고상한 파티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히피들, 파격적 사고 등으로 화제를 몰고 왔다.

6 “봄이 왔건만 새들은 울지 않고 벌레들도 날것들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없는 봄이 온 것이다.” 생물학자 레이철 카슨(1907~64)의 『침묵의 봄』 (1962)은 이렇듯 음울하게 시작한다. 살충제 DDT 살포로 다 죽게 된 지구환경 보고서였다. 그가 화학약품의 폐해와 균형 깨진 생태계를 경고한 이후 개인 소비자의 책무를 강조한 것은 1960년대 들어 전 국민적 행동으로 전개되지만 의회는 카슨이 죽은 8년 뒤에야 DDT 사용을 불법으로 한다. 환경·생태·녹색운동은 1970년 4월 22일 첫 ‘지구의 날’로 이어진다.

7 1966년 버지니아 존슨과 윌리엄 마스터스가 펴내 베스트셀러가 된 『Human Sexual Response』는 미국에서 성을 솔직히 토론하는 장을 연 계기가 됐다. 1940~50년대 ‘킨제이 리포트’에 이어 700명 남녀의 실험실 성행위를 계량화하고 육체적인 반응을 보고한 이 책은 뜨거운 논란을 불렀다. 인간의 비밀스러운 성역을 강제로 드러낸 부도덕한 작업이라는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오히려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섹스의 모든 것을 얘기하게 했다는 평가가 더 우세했다. 1960년대 성 혁명으로 서서히 나아가게 한 한 권의 책이었다.

8 ‘Human Be―In’. 1967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공원에 인디언처럼, 아프가니스탄 유목민처럼 동양식 날염을 한 셔츠 차림의 사람 2만여 명이 모여 한 무리가 되었다. ‘비트 제너레이션’의 시인 앨런 긴즈버그(사진)가 힌두식 찬가로 그날 모임을 열었다. 거기에 그레이트풀 데드, 빅 브러더와 홀딩 컴퍼니, 제퍼슨 에어플레인 등의 록 그룹이 와 있었다. 후에 버클리의 반전 주동자 가 된 제리 루빈, LSD의 선교사 레아리 등이 있었고, 이들은 이어서 Love―In(Summer of Love)을 벌였다. 여기에 나타난 차림들은 후에 ‘히피’라 불리게 된다. 무료로 벌어진 이 옥외 여름 축제는 1969년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과 함께 기존 질서·가치관과는 다른 행태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이것이 히피의 시작이다.

9 파리가 폭발했다. 1968년 5월 파리 북서 분교 낭테르대에서 대학의 관료주의와 권력에 항거한 소동이 경찰에 의해 강압되었지만 그 다음날 파리 라탱 지역으로 옮겨진 시위에서 학생들은 보도 블록을 깨고 자동차를 엎어놓고 나무를 잘라 ‘바리케이드의 밤’을 세운다. 프랑스 사회의 무기력, 지배계급의 냉소, 위계적인 드골주의에 대한 반역은 5월 11일 밤을 지나며 경찰들의 강력행위에 분노한 국민의 동참으로 커지고 노동조합과 연계해 파업에 돌입한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전국은 파국에 이른다. 결국 이듬해인 1969년 드골은 물러난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사회는 마음대로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조화(造花)다’라며 자칭 아나키스트로 살아왔다는 콩방디가 메가폰을 잡는다. “재미가 있어야 혁명도 한다.” 사르트르는 “우리 사회를 만든 모든 것을 부정하는 무언가가 당신에게서 솟아나오고 있다. 가능성의 확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포기하지 마라”고 콩방디를 지지한다.

10 미네소타대 재학 시절 ‘FOLK’를 찾아내게 된 밥 딜런(1941~)은 1961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로 와 하모니카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Rock의 시인’이 된다. 포크 음악은 1960년대 사회 변화를 위한 이상적인 표현 매체였다.

11 영국 록 그룹 비틀스가 미국의 에디 설리번 TV 쇼에 처음 소개된 것은 ‘비틀 매니어’를 이룬 ‘문화현상’으로 기록된다. 비틀스에 열광하는 소녀의 말이 시대정신을 입증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선생님도 다 비틀스를 싫어하죠. 이 세 분이 싫어하기에 내가 왜 그들을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죠.”

12 ‘우드스톡 페스티벌(Woodstock Music & Art Fair, 1969.8.15~17, 3 Days of Peace & Music)’. 뉴욕주 화이트 호수의 베델 농장 243㏊를 빌려 마련한 잔치였지만 40만 명이 몰려들어 장관을 이뤘다. 제퍼슨 에어플레인, 지미 헨드릭스, 더 후, 제니스 조플린 등 스타들이 무대를 달궜다. 10만 명 정도로 예상했던 이 콘서트는 비가 와 온통 진흙탕이 된 가운데 위생시설이 모자라고 음식이 부족했으나 평화와 사랑의 나눔터가 됐다. 호수에서 몸을 씻고 벗는 등 축제 분위기 속에서 아무런 다툼이 없고 경찰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우드스톡 국가’ ‘우드스톡 드림’이라 불리게 된다.

13 미국 팝아트의 기수 로이 리히텐스타인(1923~)은 1960년대에 만화책의 이미지를 화면 복판으로 끌어낸다. 아들이 “(아빠 그림보다) 미키마우스 그림이 더 좋아 보인다”고 말한 것을 계기로 그는 만화 그림을 망점이 보이도록 캔버스에 복사한 듯 그린 뒤 남녀 주인공의 코믹하고 멜로 드라마적인 풍선 말을 그려 넣었다(1963). 대중문화의 충격을 예술로 코멘트한 시도였다.

14 “옷은 중요치 않고 더 이상 지위 같은 것을 상징하지 않는다. 옷은 재미로 입는다.” ― 디자이너 루디 게른리치(토플리스의 모노키니 수영복을 창안, 1964)

15 ‘Rolling Stone’. 1967년 타블로이드 판형을 한 번 접어 지닐 수 있는 형식으로 나타난 1960년대의 상징 같은 잡지. 록 뮤직과 대항문화의 사진, 리뷰, 에세이를 담으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발행인인 젠 웨너는 당시 20세 청년으로 버클리대를 때려치우고 7500달러로 이 잡지를 시작했다. 랠프 그리어슨의 비평, 지적 코멘트, 반문화·반체제 운동과 톰 헤이든의 새 시대의 소리를 록음악 소식과 함께 엮어냈다. 1960년대의 많은 대안(Alternative) 잡지 중에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유일한 잡지다.

16 1960년대 자유로운 정신의 한 부분을 보여 주는 잡지 ‘EROS’. 숨겨져 있던 동서양의 에로틱한 예술을 모은 이 독특한 하드 커버 잡지는 1962년 4권을 내는 것을 끝으로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편집인 랠프 긴즈버그는 음란물 간행 혐의로 감옥행과 함께 벌금형을 받았다. 이후 ‘FACT’를 펴내 전 사회문화적인 비리에 포문을 연다.

17 ‘Zap Comix’. 1960년대 가장 흔히 나돈 코믹 만화책이다. 몇 사람의 동인이 얇은 지면에 값싸게 펴낸 새로운 만화 앤솔러지로, 이로부터 ‘언더그라운드 코믹스’로 명명된 만화사의 새로운 개념이 열렸다. 창간호(1967) 표지 그림은 그중 유명해진 로버트 크롬의 것. 10여 권을 내다가 각자 따로 포스터 작가가 되거나 독립 만화집을 내게 된다. 크롬은 1960년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안만화 미술가가 됐다.

18 1960년대 이상향을 한마디로 보여 주는 작품 ‘LOVE’.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1928~)가 만든 아이콘이다. 처음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크리스마스 카드로 디자인했던 것을 1966년 캔버스에 옮긴다. 1970년 우표로 만들어져 3200만여 점이 팔리는 기록을 남겼다. 색깔을 달리한 여러 변종 회화뿐 아니라 조각으로도 제작되었다.

19 1960년대 주장된 다양한 말과 이념을 담은 단추들. 옷깃이나 펜던트에 달고 다녔다.

참고문헌
*『The Sixties Chronicle』, Legacy Publishing, 2004
*『Anarchy Protest and Rebellion and the Counterculture that Change the America』,ed. F. W. Mcdarrah, Thunder’s Mouth Press, 2003 *『This Fabulous Century 1960~1970』, Time- Life Books, 1970 *『Our American Century, Turdulent Year, The 60s』, Time-Life Books 1998,
* ‘LIFE’ ‘LOOK’ ‘Evergreen’ 잡지 등 1960년대 출간된 간행물들


김호근씨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희한하고 새로운 사건의 이미지에 호기심 가득 찬 구경꾼이자 수집가로 살아오면서 스스로를 ‘혼자만의 히피’라 부르는 68 세대입니다. 편집 디자인 분야의 실무자이자 교수였으며, 지금은 서울 인사동에 북카페 ‘VOOK’S’를 열고 프리 에디터로 일하면서 ‘1968 이미지’전을 기획·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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