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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예수와 페니키아문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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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37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평화로운 동산이 예수가 산상수훈을 행한 곳이다. “이제 우는 그대들이여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그 동산 언덕 중턱에 산상수훈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저 산 너머에 갈릴리바다가 있고 그 주변으로 가버나움, 벳새다, 고라신이 있다. [임진권 기자]

독자들은 누구든지 예수의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을 기억할 것이다. 그 산은 갈릴리바다(호수) 북단에 있는 가버나움 부근 타브가(Tabga) 지역에 있다. 이 자그만 동산에서 예수는 “가난한 그대들이여!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주린 그대들, 부드러운 그대들, 자비를 베푸는 그대들, 마음이 깨끗한 그대들, 평화를 만드는 그대들, 나로 인하여 핍박받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야말로 천국의 지복(Beatitudes)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 굶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고, 우는 자가 기쁨으로 충만케 되리라는 예수의 말씀은 소외된 민중들에게 “기쁜 소식” 즉 복음(유앙겔리온)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들으러 온 군중들은 결코 갈릴리의 헐벗은 농민들만은 아니었다.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 산상수훈의 핵심은 Q복음서에 들어가 있으므로 예수운동의 리얼한 정황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설교를 들으러 갈릴리바다 북단에 몰려든 사람들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산상수훈교회(Church of the Beatitudes)는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발루치의 설계로 1938년에 완공되었다. 8복설교를 상징하여 8각의 돔이 있다. 로마 가톨릭 프란시스칸 신부들이 이 교회를 주지하고 있다.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눅 6:17).
여기 “제자의 허다한 무리”(a great crowd of his disciples)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제자는 결코 12명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12명의 제자라는 것은 불트만이 주장하는 바 후대 초기교회의 종말론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 혹은 최후의 심판 이후 12제자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리게 되리라는 유대화파 교인들의 선민의식을 반영한 것이다(눅 22:30, 마 19:28).

문제는 그 다음의 군중에 대한 설명에 있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이라는 표현은 매우 상이한 두 문화권 사이에 예수의 갈릴리 선교지역이 완충지대로서 끼여 있었던 지정학적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이란 갈릴리의 입장에서 보면 남방의 유대문명(Jewish civilization)을 가리킨다. 그러나 “두로(Tyre)와 시돈(Sidon)”은 갈릴리의 북방, 지중해 해안으로 펼쳐져 있는 페니키아문명(Phoenician civilization)을 가리킨다. 두로와 시돈이야말로 비블로스(Byblos, Gebal, Jubayl), 베이루트(Beirut, Berot, Berytos)와 함께 페니키아문명의 4대 중심 도시였다.

우리는 팔레스타인문명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에 젖어 있다. 사실 그런 관념은 우리가 미국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난 편견일 수도 있다. 아니,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라는 메소포타미아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신·구약성서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바빌론문명이다. 그리고 바빌론문명과 더불어 생각해야만 하는 문명이 페니키아문명이다. 그러니까 현재 국가 개념으로 생각하면 이라크·시리아·레바논을 연결하는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지대야말로 중동 전체 문명의 핵심적 주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갈릴리는 그 아이덴티티가 남방의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지역보다는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개방적 선진문명에 더 근접해 있었고 더 동화되어 있었다. 당시 두로와 시돈의 찬란한 역사에 예루살렘을 비교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 관념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갈릴리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루살렘은 변방의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성전 하나 덩그렁 있는 촌구석으로 비쳐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음의 예수의 말씀(로기온 자료)을 한번 되씹어보자!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삶의 방식을 바꾸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1~22, 눅 10:13~14, Q31).

여기 예수의 저주의 언사 속에 나오는 고라신(Chorazin, Kirbet Keraze)과 벳새다(Bethsaida)는 예수가 활동한 가버나움 부근의 도시로서 갈릴리바다 북부의 부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를 배척하는 이 동네들을 향하여 저주를 말하면서 상대적으로 두로와 시돈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관념에서 본다면 두로와 시돈은 저주스러운 이방도시요, 바알신앙의 본거지며, 역사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오므리왕조의 왕 아합(King Ahab)의 부인 이세벨 여왕(Queen Jezebel)의 고향이었다(왕상 16:31~33). 이세벨은 사마리아에 바알산당을 짓고 바알제단을 세워 선지자 엘리야와 대결한다. 결국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기손 시내(the Kishon Valley)에서 도륙하는 참극을 벌인다.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낙타 털로 짠 거친 옷을 맨살 위에 입고 재를 머리에 부어 누추한 모습을 만드는 유대인의 관습을 말하는데 이것은 참회를 상징하는 것이다.(욘 3:5~6).

예수는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이야말로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참회하고 삶의 자세를 바꾸었을 것이라고 희망과 기대에 찬 언사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심판의 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유대인들의 도시보다 더 축복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너무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러한 성서 구절들을 역사적 정황과 단절시켜 간과하고만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입장에서 이 도시들을 감지하는 느낌을 말한다면 주변의 고라신과 벳새다가 충청도의 작은 도시에 비유된다면 두로와 시돈은 뉴욕 맨해튼의 느낌이었다. 당시 지중해 연안의 최대 도시였다. 지금도 두로에 가면 예수와 동시대의 히포드롬(대전차 경기장)이 남아있는데 길이 480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다.

페니키아문명은 상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도시국가들의 연합체 형식을 견지했으며 따라서 제국문명의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랫동안 서구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건립한 제4왕조(BC 2613~2494) 시절부터 이미 왕성한 무역을 통하여 이집트문명을 흡수하였고, 아카디아, 힛타이트, 필리스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지배를 차례로 경험하면서 그들의 문명을 배합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벌 때도 두로는 극렬하게 저항하였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프톨레미왕조에 속했다가 셀레우코스왕조에 병합되었으며 BC 64년에는 폼페이우스에 의하여 로마제국에 복속되어 시리아주로 편입된다. 그러나 두로와 시돈은 상인들에 의하여 왕권이 제약되는 형태의 자치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페니키아문명은 희랍문명보다도 훨씬 오래된 고문명이며 BC 15세기에 이미 22글자의 알파벳을 발명하였고 그것이 희랍문자의 모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근세 서방 알파벳의 조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 서양문명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희랍문명보다는 페니키아문명에 도달케 된다. 예수는 이 페니키아문명의 역사적 배경과 개방적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가 말한 아람어(Aramaic)도 페니키아어군에 속하는 것이다. “페니키아”라는 말 자체가 후대에 희랍인들이 명명한 것이며, 그들 자신은 가나안(Canaanites, 아카디아말로는 Kinahna)이라고 불렀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라고 동경했던 그 가나안이 페니키아의 별칭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페니키아·시리아문명에 속한 에데사왕국의 아브가르왕이 갈릴리의 예수를 초청했다는 이야기도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의 쌍둥이 형제며 제자인 도마는 예수의 사후 에데사왕국으로 갔고 거기서 도마기독교를 정착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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