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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못할 황당 사기꾼

중앙일보

입력

뉴스위크존 R 브링클리 ‘박사’의 영광과 좌절을 그린 포프 브록의 전기 ‘돌팔이의사(Charlatan)’를 할리우드가 아직 영화로 만들지 않고 망설이는 이유가 뭘까? 적당한 연기력의 배우에게 하얀 정장을 입히고 안경을 씌운 다음 반다이크 수염을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또 대공황 시대의 캐딜락을 10여 대 구해 죄다 붉은색으로 페인트 칠을 해야 한다. 브링클리가 살던 텍사스주 델 리오의 루드비히-오브-바바리아 맨션 외벽(나중엔 라임 녹색으로 바뀌었지만) 색깔에 맞춰서 말이다.

그리고 발기불능인 남자에게 염소의 고환을 이식하는 브링클리의 무시무시한 수술 장면, 또 그가 캔자스 주지사 선거운동에 나섰던 군중집회 장면, 그리고 술에 취해 총과 정육점 칼을 휘젓는 장면을 배치해야 한다.

카메오 출연자로는 브링클리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보이스타운(소년원)의 플래너건 신부, 브링클리 소유의 요트 3대 중 하나를 임차했던 윈저공 부처, 그리고 컨트리 음악의 왕족 카터 가족을 등장시키면 된다. 거기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법정장면까지 더하면 돈 벌기는 식은 죽 먹기 아닐까? 아마 브링클리도 아주 기뻐했으리라.

무엇보다 짭짤한 수입 때문에.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과연 관객들은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에 나오는 마블 교수와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The Boys From Brazil)’의 조셉 멩겔 박사를 뒤섞어 놓은 듯한 이 인물을 어떻게 이해할까?

자멸적인 명예훼손 소송으로 브링클리를 끌어들여 몰락시킨 인물은 미국의학협회지의 모리스 피시바인 편집장이었다. 1937년 피시바인은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하지만 브록이 언급한 대로 오늘날 이 정의의 사나이는 잊혀졌지만 학위남발의 사기꾼 사나이는 무시무시하지만 재미있는 유명인사가 됐다.

대공황 때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던 ‘의료행위’는 그저 단순한 사기행위가 아니었다. 브링클리는 염소의 고환을 사람의 음낭에 대충 갖다 붙였으니 말 그대로 살인행위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환자’가 그의 손에서 죽어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1930년 캔자스 의사면허국은 42명의 사망을 확인하고 브링클리의 면허를 취소했다. 그래서 브링클리는 멕시코 국경에 접한 델 리오로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10여 년간 사업을 했다. 증상을 호소해 오는 환자들에게 우편으로 판매했던 ‘처방전’이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 모른다. 브록은 브링클리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범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브링클리는 미국 문화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1930년 캔자스 주지사 선거에 나섰을 때(정식후보가 아니어서 브링클리를 찍으려면 유권자들은 그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써야 했다), 권력자들이 짜고 재검표만 막지 않았어도 그가 승리했을지 모른다.

라디오 방송을 선거홍보로 뒤덮다시피 하고 전용비행기를 이용해 유세를 다녔다. 이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선거유세를 하는 시초가 됐다. 또 그의 방송은 AM 라디오의 전형이 됐다. 얘기를 나누고 음악을 틀어주며 어수룩한 사람들을 사기행각에 끌어들였다.

그는 처음에는 캔자스의 KFKB 라디오 방송국을, 후에는 델 리오의 리오 그란데 강 바로 건너편에서 미국을 향해 고출력 방송을 송출하는 메가와트급 XER(XERA의 전신) 방송국을 소유했다. 이 방송국들은 멀리 알래스카까지 미국인들에게 카터 가족, 지미 로저스, 레드 폴리, 진 오트리 등의 컨트리 음악을 소개했다. (그런 사람 중 한 명이 인생의 반려자 준 카터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나이 어린 자니 캐시였다. 모두 브링클리 덕분인 셈이었다.)

브링클리 사후 XERA의 DJ 밥 스미스(별명 울프먼 잭)가 블루스와 R&B 장르에서 똑같은 역할을 했다. 브록이 말하듯 약간 과장하자면, 그 국경방송국들은 “흑백 크로스오버 문화를 생성시켜 로큰롤의 탄생과 영화에 기여했다.”

‘돌팔이의사’에 브링클리의 방송CD가 포함되지 않아 안타깝다. “왜 그렇게 망설이십니까… 이렇게 싼 가격에 해드리는데… 너무 늦기 전에 일단 브링클리 병원에 오십시오.” 청취자들은 대개 시골 사람들이었다. 그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식의 설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 이제 그들이 왔을 때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말씀하셨던 여덟 가지 복(福)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또 ‘어머니’와 ‘고속도로 안전’과 같은 주제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몇 분 정도만 옆길로 새야겠습니다. 여러분을 추억의 나날로 모시겠습니다.

강둑을 따라 피어난 제비꽃처럼 인생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솟아오르는 자그마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는 또 코플린 신부 같은 우익 정치선동가의 현대판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의 기쁨입니다. … 베들레헴의 부드러운 불빛보다 전쟁의 신 마르스의 번득임을 더 좋아하는 모든 급진주의자들을 추방하겠습니다.”

그의 의료 행위도 전립선이나 직장 수술 등으로 가지를 뻗었다. 별도로 직장전문 병원까지 지었다. 그는 청취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억하십시오. 델 리오에는 전립선, 산 후안에는 직장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을 세웁시다.”

탐욕은 그렇다 치고, 과연 브링클리를 움직이게 한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지독한 가난 속에 성장했다. 겨울에는 부대 자루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 하지만 자신의 무능력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치명적 사태에 그는 황당할 만큼 무관심했다. 이는 병이라고 해야 한다.

그는 반사회적 이상성격자였을까? 자아도취증 환자였을까? 브록은 그에게 감히 진단을 내리지 않지만 브링클리의 맨션을 방문했던 델 리오 출신의 한 여성이 보낸 오래된 편지를 인용했다. 브링클리의 집은 갈라파고스 거북들이 돌아다니고 그로먼 차이니즈 시어터에서 공연하는 오르간 주자가 직접 연주하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다.

제독 복장에 자신이 잡은 정어리를 들고 잔뜩 폼을 잡은 브링클리의 대형 사진은 손으로 직접 채색됐는데 제목이 ‘정어리 생선과 나’였다. “분명히 그는 허영심과 야망의 희생물”이라고 그 여인은 썼다. “세상을 향해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끊임없이 말하고, 진정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려고 지독하게 갈망하는 것은 너무나 끔찍하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사람들 자체가 비극 같다.” 브링클리가 그 많은 희생자에게 저질렀던 일을 생각하면 너무 친절한 설명이다. 아무튼 하나의 해석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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