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숭례문 … 릴레이 추도사 ④·끝 서울 토박이 화가 황주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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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황주리씨가 본지에 글과 그림을 보내왔다. “늘 함께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께 숭례문 소식을 띄운다”며 우표도 한 장 붙였다. 낮달을 인 숭례문이 묵묵히 우리를 바라본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익숙했던 장면이다. 40×50㎝ 종이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렸다.

차를 타고 가다가 쓰러진 숭례문의 처참한 흔적들을 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이 밀려든다.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목이 메는 깊은 슬픔이다. 서울 토박이인 나의 기억 속 서울의 풍경화는 떡 버티고 서 있는 숭례문의 그림자 하나만으로도 나무랄 데 없이 늠름한 구도를 지닌다. 오랜 미국 생활 사이사이 떠오르던 그리운 서울의 풍경 한가운데 숭례문이 있었다.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마음속에 위안을 주는지 우리는 잃어버린 뒤에야 깨닫는다. 마음속 네 귀퉁이를 받쳐온 커다란 기둥 하나가 뿌리뽑힌 기분이다.

아무리 복원해서 다시 세운들 몇백 년을 한결같이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지켜봐온 예전의 숭례문만 하겠는가? 내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 우리는 남대문시장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스무 살, 그 이유도 없이 우울하던 날에 온갖 물건이 즐비한 시장을 휘젓고 다니다가 눈을 들어 바라보면 숭례문이 든든하게 서 있었다. 그때 그 하늘 위로 낮달이 문득 떠 있었다.

그 숭례문이 쓰러졌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우리 아버지처럼. 암 선고를 받은 지 며칠 만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처럼 숭례문도 그렇게 많이 아파했을까?

내게는 눈을 뜨고 세상을 지켜보던 숭례문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 많은 무더운 날들과, 얼어붙는 추위와, 전쟁의 폭풍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아 서울을 지키던 그 눈빛.

그 위로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지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내가 살던 뉴욕의 아파트가 바로 월드트레이드센터 옆 건물이었고, 십 년을 그 거대한 건물 속을 지나다녔다. 창밖으로는 매일 월드트레이드센터 건물 뒤로 해가 뜨고 해가 졌다. 정들면 타향도 고향이라, 남의 나라의 상징적 건축물이 쓰러졌을 때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물며 내 나라 국보 1호 숭례문임에랴.

저렇게 훨훨 불이 붙어, 내 마음에 불이 붙어, 말릴 길도 없이 타버린 우리들 마음속의 보물, 숭례문이 쓰러졌다. 내 아버지가 늘 잘생겼다 하시던 숭례문이 쓰러졌다.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도 아니고 토지 보상금을 조금밖에 받지 못한 데 분노한 평범한 칠순의 서민 한 사람이 숭례문을 쓰러뜨렸다. 아마도 그는 내 나라가 싫어서였을까?

누추한 내 집에 내 땅에 내 나라에 확 불질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어른이 된 가난한 젊음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칠순의 나이에 숭례문에 불을 지른 사람의 마음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차라리 자기 몸을 태웠으면 태웠지 숭례문이 웬 말인가?

아버지처럼 말없이 우리를 지켜보던 숭례문을 쓰러뜨린 건 칠순의 평범한 서민 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들의 보물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늘 무심하기 짝이 없었던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쓰러뜨린 것이다. 늙으신 아버지의 무사함에 무심했던 불효자식들처럼.

아버지를 생각하며 숭례문을 추억한다. 참 그리운 이름이다.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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