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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북녘동포>25.제3부 4.실업자 없지만일거리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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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북한의 사회주의식 계획경제 아래선 실업자란 있을 수 없다.당국도 계획경제의 완전고용을 자랑하고 있다.공장의 완전가동을 의미하는「만(滿)가동 만부하(負荷)」도 단골구호였다.그러나 산업현장의 실정은 딴판이다.실업자는 없다지만 일거리도 없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무원산하 채취기계공업총국 함흥지구공급사업소에서 원자재 수송을 담당한 여만철(51)씨는『북한경제는 전체적으로 20%쯤 가동될 뿐』이라고 말한다.일거리가 없으니 월급이 제대로 나올리 만무하다.직장을 다녀도 잠재실업자인 셈이다.
『국가생산계획은 의미가 없다.계획의 일원화.세부화 방침은 당국이나 하는 소리다.』(정진만.47) 『대형 기업체는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편이다.간장.된장 등을 만드는 강계시 7월 식료공장의 경우 종업원 3천여명 가운데 3백명만 일하고 나머지 2천7백여명은 일손을 놓고 있다.』(고청송.34) 설비.자금 등의 고갈현상은 10여년 전부터 심화되어 왔다.계획경제체제는 사실상「계획」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정기해.52) 『성천 자동차부속공장은 신형기계가 고작 두대 뿐이다.나머지는 일제시대 것과 공작기계 새끼치기운동으로 만든 것이다.정밀도가 아주 낮을 수 밖에 없다.한번은 오토바이 부속나사를 깎기위해 평성과 성천 일대 공장을 뒤지다시피 했지만 결국 정확하게깎을 수 없었다.』(김광욱.27) 『공장.기업소마다 설비는 낙후되어 있어도 노동력은 과잉이기 때문에 운영이 제대로 될 리 없다.그렇다고「실업이 인정되지 않는 체제」에서 인력감축이란 돌파구도 없다.인력은 당국의 계획기준으로 배정되므로 항상「만부하」를 유지해야 하는 모 순이 발생한다.공장이 이쯤 되면 생산시설이라기 보다 인력수용시설에 가깝다.』(정기해) 『「실업자가 없다지만 사실은 모두가 실업자」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김대호) 『임금은 당연히 계획에 따라 설정된 목표치가 달성돼야 지급된다.툭하면 공장가동이 중단되는 실정에서 규정상 평균 1백원선인 임금이 30~40%정도도 돌아가기 어렵다.이 때문에「임금의 60%는 반드시 지급하라」는 지침이 위에서내려왔 다.』(정기해) 그러나 최근 들어 사정이 더욱 어려워졌다.60%보장이 아니라 아예 몇달씩 체불되거나 물건으로 대신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정진만씨는『평북 피현군 양착베어링공장은 고열탄 부족으로 한달이면 10일정도만 가동했다.노동자들은 10일분치 임금만 받아갔다』고 말했다.『나진 승리화학공장.남흥 청년화학공장.남포제련소등도 사정이 비슷했다』며『공장에서 돈을 줄 형편 이 안돼 물건으로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옥금(45.여)씨는『유치원 보모인 딸이 93년 11월분까지만 임금을 받았을 뿐 다음해 3월까지 노임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탈북했다』고 밝혔다.李씨는 이어『공장에 일거리가 없어지자 결혼한 여성근로자들은 직장을 그만두는 분위기가 자 연스럽게 형성됐다』고 말했다.
『모든 공장.기업소.농장 등 생산단위와 경제기관은 당기관에 종속돼 있다.경제운영은 철저히 당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정치를 우선하는 당비서와 경제논리와 전문성을 위주로 책임량을 채워야 하는 지배인 사이에 갈등은 필연적이다.』(정기해) 『당비서와 지배인의 관계가 원만한 공장이 드물다.성천자동차 부품공장에근무할 때 당비서와 지배인간에 다툼이 있었는데 지배인이 갈렸다.그러다 보니 노동자들이 당비서에게만 인사하는 경향도 나타났다.』(김태범.33) 황북 평산 남천화학연합기업소에 근무한 김대호씨의 증언-.
『매월초 직장 당위원회가 열린다.직장당비서.지배인.직장장.부직장장.공정원.작업반장.통계원 등이 참석한다.월간계획과 노동관리 등이 보고되면 지배인이 아닌 당비서가 이를 총정리하는 식이다.생산활동은 당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진행된다.회의 에서는 지난달의 생산총화 뿐 아니라 간부들의 생활상 문제도 다루어지므로당의 독재기능이 관철된다.』 여기서 당의 독재란 북한에서「좋은뜻」으로 사용된다.민주의 반대말이 아니라「노동계급 독재」식으로정당시되는 경우다.고운기씨는『당의 유일사상체제를 본격적으로 확립하기 시작한 68년부터 당기관의 위신이 급등했다』며『그 이전에 절대적이 었던 지배인의 기업운영권이 모두 당으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62년에 등장했던「대안의 사업체계」는 노동자의 의견을 중시하고 윗 기관이 아랫 기관을 잘 도와주도록 돼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공장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에 대해 지배인이 경영책임을 지는 형태로 되어있다.공장 당위원회의 결정과정에 노동자 대표들도 참가시키지만 발언권은 거의 없다.그러나 결과적인 책임은 항상 당비서가 아닌 지배인에게 돌아가 게 되어있어 불만을 샀다.』(윤웅) 『직원들이 공장 지배인보다 당비서의말을 더 잘 듣는다.정치적 평가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인생을 망치기 때문이다.김일성(金日成)은 당비서가 나서지 말고 행정.경제 일꾼을 뒤에서 밀어주라고 말했지만 권력이 당에 있으니 지배인 말이 먹 혀들지 않는다.』(정현.31.유학생) ***땅에 떨어진 근로의욕 『남한에서 처럼 일하면 북한에선 노력영웅이 되고도 남는다.주어진 일을 구태여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현상이 퍼지고 있다』고 김태범씨는 말한다.임금체계가 이른바 자본주의 요소를 담고 있는 도급제로 바뀌어야 노동습관이 달라질 것이라고덧 붙인다.
임영선씨는『노동자들 사이에「젊어서 꾀병은 늙어서 보약」이라는노동기피의 유행어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소개한다.열심히 일해봐야 말로만 하는 칭찬 뿐 물질적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84년 이후 무상으로 나오던 물자공급 혜택마저 유상으로 바뀌었다.나는 공장 핵심기술자인 공정원인데다「숨은 영웅」이어서 피복류나 술을 몇차례 받아 보았다.김정일(金正日)이 직접 수표(서명)한 선물을 받았는데 마분지 상자속에 물고기. 과일통조림.과자.마른 명태 등 식료품과 술 등이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공장 전체에서 1년에 1~2명 정도 받을 뿐이다.보통 노동자에게는 화환 걸어주고 붉은기 쟁취운동때 영예등록장에 등록해 주는게 전부다.』(정기해) 『공을 세우더라도 대개는 지도자인 초급당비서나 직장장.세포비서들의 몫으로 돌아간다.노동자가 어떤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따라서 노동자들은 시간이 빨리 가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다.』(엄만규) 『작업시간은 생산기구가 없으니 순전히「인력전」이다.그나마 담배 한 대 피워물면 1시간쯤은그냥 간다.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절박감이 없기 때문에 비효율의 극치다.』(정기해) 『근로에 대한 책임감이없다보니 아예 병원을 끼고 멀쩡한 사람들이 요양권을 구해 장기휴양을 하는 현상이 퍼지고 있다.의사들이 1개월용이나 45일용요양권을 한장에 2백원정도 받고 팔아 부수입을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요양소나 온 천에 장기체류하는 가짜 환자들이 전체요양환자의 60%는 차지할 것이다.』(윤웅) ***속도 나지 않는 「속도전」 『생산현장은 전장이다.고지점령이라는 승리를 위해「속도전」이 벌어진다.「항일유격대식 건설」도 근로의욕을 자극하려는 맥락에선 마찬가지다.그러나 툭하면 속도전을 부르짖는데 신물이 난 노동자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당국은 속도전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완행전」이 반복되기 십상이다.』(김영성) 90년부터 2년동안 중앙속도전 돌격대에 나가 평양건설에 참여한 백영길씨의 증언-.
『평양 통일거리에서 아파트를 건설할 때 나는 교양소대장이었다.돌격대 탈영대원을 잡으러 다녔는데 4백~5백명 규모 1개 대대에서 1개월이면 평균 30명 정도가 탈영했다.부족자재는 중대별로 새벽 2시쯤 일어나 다른 작업장의 것을 훔쳐 온다.
탈영자들은 배가 고팠을 뿐 아니라 자재 훔치기도 고역이었다고털어놓았다.』 『속도전이 잦다 보니 효력이 없어졌다.더구나 에너지.원자재 부족이 뻔히 내다보이므로 기업체마다 생산계획 단계에서부터 목표치를 작게 잡히려고 애쓴다.특히 1.2.4월은 다른 달보다 목표를 낮춰잡는다.1월은 신년사를 지키기 위해,2.
4 월은 金부자 생일이 있으므로 계획을 달성하지 못해도 달성한것처럼 해야 하기 때문이다.11월과 12월은 생산계획을 미달시켜 원자재를 빼돌리고 반제품은 생산하지 않은 것처럼 보고해 실적의 20~30%를 다음해 1월로 넘긴다.』(정기해) 김대호씨는『당국은 이제 80년대처럼 전망목표를 내놓고 독려하면 반감만살 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면서 최근 들어 속도전방식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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