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경제학>秘資金 보호의 智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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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공무원 아내들이 차마 털어놓기 어려워하는 일이 있다.알뜰살뜰모아 놓은 목돈이 죄다 들통났다.남편의 재산등록 때문에 결국 아내의 비자금(비資金)도 밝혀질 수밖에 없다.실명제(實名制)가실시되는 마당에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단다.
적어도 아들 딸 혼사 치를 때까지만이라도 비밀로 했었으면 하는 자금들이 모두 까발려져 속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남의 이름으로 저금할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오히려 문제가 복잡해진다.남편 몰래 돈 모았다가 어느날 『여기 있소』하고 내 놓으며 큰 소리를 치거나 가계의 적자를 메워줄 긴급자금으로 묻어두는 재미도 없어져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는 표 정이다.
이제는 아내들이 남편의 속마음을 떠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금융기관들이 예금자의 은행거래 내역(內譯)을 3개월마다 통보해 주므로 남편에게 배달되는 편지내용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될 것이다. 최근에 어느 신용금고는 『예금이 만기가 됐으니 찾아가라』고 남성고객의 집에 통보했다가 혼쭐이 났다.
예금주는 그날 저녁 아내의 추궁에 시달렸다.아내를 뭘로 봤길래 감추기까지 하느냐는 눈물공세가 시작됐다.나이 먹은 여성층일수록 남편의 비자금으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쉽다.
비록 이해하는 제스처를 보이면서도 『나 죽으면 어떤 여자하고살려고 그러느냐』며 비꼬기 시작해 부부싸움의 빌미를 제공한다.
거래내역 통보 때문에 아내와 격심하게 말다툼을 벌인 고객들이비밀을 「폭로」한 은행과 아예 거래를 끊겠다고 항의해 금융기관들이 난처한 입장에 빠지기도 한다.
실명시대에 비자금관리를 두고 남성들의 지모(智謀)와 여성들의지모가 여러 갈래로 탐색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주부가 가정의 경제권을 독점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따로 용돈을 관리하려는 남성들의 고뇌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제일기획이 최근 조사한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소비행동」에 따르면 아내가 남편의 월급을 전액관리하는 경우가 60%를 넘어선다.
생명보험 가입여부도 아내가 결정하는 비율이 해마다 높아지고 남편의 목소리는 약해진다(생명보험협회조사).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여전히 큰 돈을 만지는 남성 아래에 있으니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며 위안을 삼는 남편들도 있다.

<최철주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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