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地·人이 함께 빚은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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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 23면

미국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농장에 가본 적이 있다. 차로 5분을 달려도 끝나지 않는 광활한 밭. 검푸른 나무에 매달린 주먹만 한 노란색 오렌지의 선연한 대비는 햇살에 비친 바다가 넘실대는 듯했다. 한 자루에 채 2000원이 되지 않는 오렌지를 먹느라 미국 체류기간을 다 허비한 얘기는 이제야 할 수 있다.

윤광준의 생활명품 이야기-제주 위미 오렌지

제주시청에 근무하는 친구 P가 아니라면 오렌지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일백 번도 더 다녀봐 익숙한 제주의 곳곳을 샅샅이 보여 주고 진미를 맛보게 해준 그의 애정은 눈물겨웠다. 그 백미는 남원읍 위미 마을에서 생산되는 오렌지의 맛이다.

여러 나라에서 맛보았던 오렌지 가운데 이탈리아와 네팔의 것이 인상에 남는다. 캘리포니아산은 흔한 만큼 맛은 그저 그렇다. 국내산 가운데 최고의 맛을 치자면 단연 위미의 오렌지다. 껍질은 얇고 더 달며 과즙이 많고 향도 풍부하다.

개인적 기호를 단정 짓는 일은 위험하다. 하지만 전국의 작목가 사이에서 위미산이 이름 높다면 잘못된 판정은 아닌 듯싶다. 대부분 사람의 입맛에는 더 좋은 맛을 기막히게 감별해 내는 공통의 지점이 있다.

위미의 오렌지(청견·한라봉)는 광활한 밭이 아닌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된다. 위미의 오렌지가 더 맛있다면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를 인정하는 셈이다.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 노력은 정당했다.

모든 농산물이 그렇듯 작물은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땅이고 제주는 대한민국 땅이 아니던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힘뿐이다. 위미의 자연농업작목반은 오렌지에 목숨 건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이 밀려오는 수입 오렌지를 능가하는 질적 차별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면 위미 오렌지의 존재 의미는 없다. 더 맛있는 오렌지의 비결은 제주 남부의 기후적 특성과 오랜 감귤 재배 경험을 활용한 새로운 시도다. 이들은 농약과 화학 비료를 쓰지 않는다. 지력을 높여 제초제를 대신하고 멸치와 고등어, 동물의 뼈, 달걀껍질을 이용한 미생물 발효 퇴비를 사용한다. 토질만으로 키워낸 유기농법 오렌지의 맛은 하늘과 땅의 한계마저 극복해낸 사람의 승리다.

하도 흔해 약발 떨어지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무농약 농산물 인증은 잊어 버려도 좋다. 혀끝에 느껴지는 식감과 달콤함만으로 차이는 충분하다. 입맛 까다로운 우리 마나님이 위미 오렌지가 아니면 먹지 않은 지는 꽤 오래다. 위미 마을의 오렌지를 함께 맛보았던 일행들이 넘치는 짐에 더해 무겁게 한 상자씩 사들고 간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매니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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