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산책>무관전락 曺薰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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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바둑황제 조훈현(曺薰鉉)9단이 무관(無冠)의 신세로 전락했다.제자 이창호(李昌鎬)7단의 등쌀에 못견뎌 마지막 보루 대왕타이틀마저 빼앗긴 것.
지난해 0대3이라는 일방적 스코어로 대왕위를 잃은 李7단은 스승이 보유중이던 나머지 타이틀을 닥치는대로 앗아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모조리 빼앗기가 미안하니까 스승대접으로 가장 실속이 적은 대왕자리를 미리 헌납한게 아닐까 』라는 말을들었을 정도다.
비록 규모는 작을망정 「무관」만은 면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는데 범처럼 사나운 제자가 그나마도 거두어가 버리니(3승1패)이제 타이틀이 한개도 없는 이른바 「가벼운 행마」가 되고 말았다. 왕년에 천하를 세번씩이나 통일했으며 세계4대프로기전을 한번이상씩 섭렵해 그랜드슬램의 위업달성이라는 바둑사상 초유의 대기록을 세운 바둑황제 曺9단의 무관 전락은 승부세계의 무상함을 실감케 한다.
조훈현같은 천재도 나이는 어쩌지 못함인가.그의 나이 벌써 43세.불혹을 넘어선지 오래다.아닌게 아니라 체력이 급격히 떨어질 연령이다.
한국바둑의 개척자 조남철(趙南哲)선생이 40대시절 한탄했던 내용이 문득 떠오른다.『10대,20대 시절에는 장고할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수가 잘 보이지만 40대가 넘으면 뇌속에 안개가 자욱하여 오직 몽롱할 따름이다.』 그래서인가.제자와 만나기만 하면 포석에서 중반까지 압도하거나 멋지게 앞서나가다가 종반에 실족(失足)하는 경우가 많아 주위를 안타깝게 하는 요즘이다.
최근의 배달왕기전 결승5번승부가 그 대표적인 예다.제1국도 잘 나가다가 역전패 당했으며 제2,3국은 지려야 질 수 없는 필승지세를 노래하다 어이없이 끝내기에서 자멸했던 것.
「바둑은 이기고 승부는 진 격」이라 할까.3승으로 일축할 내용이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영패를 면치 못했으니 당사자로서는 피를토할 노릇이다.
『이야말로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다 할까요.李7단은 아무리바둑이 불리해도 밤 늦게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승리가 절로안겨지니까 말입니다.』그 어이없는 해프닝에 얼이 빠진 해설자가쏟아놓은 넋두리다.
빅타이틀중의 하나인 기성전 결승7번기 마지막 단판승부에서도 曺9단은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일방적으로 밀리다가 3승3패 동률을 이루는 저력을 발휘,팬들로부터 열띤 응원을 받았던 曺9단은 최종국 중반까지는 필승지세의 판을 짰으나 오후 9시이후 어이없는 실수로 자멸,무관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曺9단이 제자한테는 이렇듯 피눈물나게 당하면서도 외국기사들에게는 거꾸로 절망적 상황에서도 번번이 대역전드라마를 펼치며 불사신노릇을 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동양증권배에서의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9단,진로배에서의 린하이펑(林海峰)9단과의 대국을 돌이켜보시라.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라 할까.제자에 당한 분풀이를 애꿎은 외국기사들한테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조화인가. 현재 李7단은 기성.국수.배달왕.국기.기왕.명인.패왕.
BC카드배.최고위.대왕.KBS바둑왕.SBS배최강전등 12관왕이다.과거 스승이 이룩했던 「천하통일」의 영광을 꿈꾸고 있음직하다.그러기 위해서는 숙적 유창혁(劉昌赫)마저 셧아웃 시 켜야만할 것이다.
현재 劉6단의 도전을 받은 패왕전에서는 2승1패로 앞서고 있으며,최대규모인 랭킹1위 왕위전(타이틀보유자 劉昌赫)의 도전자선발리그에선 5승무패로 스승과 나란히 선두를 달리는 중이다.
〈프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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