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기쁨 <47> 세계 백포도주의 양대 산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7호 31면

프랑스 부르고뉴의 명품 와인 ‘르 몽라셰’.

요새 나는 신맛 백포도주에 빠져 있다. ‘신의 물방울’에서 백포도주를 좀 더 다루자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다양한 산지의 백포도주를 연거푸 마신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압도적으로 적포도주파(派)였는데, 막상 마셔보니 백포도주도 깊이가 있었다. 각 테루아르마다 맛의 특징이 적포도주보다 이해하기 쉽게 표현돼 있는 것 같다.

프랑스의 보르도와 론, 신대륙에서도 뛰어난 신맛 백포도주를 만들고 있지만 복잡성과 기품에 있어서는 역시 프랑스 부르고뉴가 세계 최고의 산지다. 그중에서도 양대 챔피언은 몽라셰의 두 곳(퓔리니와 샤사뉴)과 뫼르소. 두 마을은 이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몽라셰 마을은 백포도주의 최고봉 ‘르 몽라셰’와 작지만 주옥 같은 특급밭 ‘슈발리에 몽라셰’를 거느리고 있다. 한편 뫼르소 마을은 ‘페리에르’ ‘주네브레르’ ‘레 샤름’ 같은 특급에 맞먹는 일급 ‘3대 가문’이 포진해 있다. ‘르 몽라셰’는 『삼총사』의 작가 뒤마가 “무릎을 꿇고 마셔야 한다”고 말한 세계 최고봉 백포도주인데 10년 이상 병에서 숙성시키지 않으면 끄떡도 하지 않는 와인이다. 한번은 갓 발매된 루이 자도의 그것을 마셔봤는데, 디캔팅을 두 번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도처럼 날카롭게 빛나기만 할 뿐 조금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몽라셰 마을의 와인은 ‘강철’에 비유되듯 단단하다. 길게 찢어진 눈초리에 콧대 높은 차가운 미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몽라셰에 있는 두 곳이 모두 경사지에 펼쳐져 있다는 점이 이처럼 샤프하고 예리한 술의 질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뫼르소 와인은 ‘밀짚색’이라는 색깔부터가 매우 친밀하게 다가온다.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향기가 관능적이다. 살랑거리는 황갈색 긴 머리칼에 얼굴이 동그란 여성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몽라셰 마을과 달리 뫼르소 마을은 대부분 평평한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대조적인 개성 때문인지 백포도주 애호가는 뫼르소 파와 몽라셰 파로 나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양쪽 다 좋지만 굳이 말하자면 겨울에는 따스함이 묻어나는 뫼르소가 좀 더 맛있고, 날이 더워지면 몽라셰의 야무진 단단함이 사랑스러워진다.

그날 기분에 따라서도 마시고 싶은 백포도주가 달라진다. 최근 고등학교 동창이 돌연사했다. 이상하게도 이날은 나도 모르게 부드러운 뫼르소에 손이 갔다. 마음이 들뜬 날에는 몽라셰 계열로 진정시키고,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는 뫼르소로 위로받는다. 이런 ‘기분과의 마리아주’도 심오한 세계관과 독자적인 개성을 지닌 와인만의 재미일 것이다.
번역 설은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