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화폐 … 골프장서도 OK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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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26면

1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1층의 상품권 판매대. 설을 앞두고 상품권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번호표를 받아 들고 차례를 기다리던 회사원 유진(21·서울 목동)씨는 “명절마다 집안 어른께 드릴 선물로 상품권을 산다”며 “상품권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원하는 물건으로 바꿀 수 있어 실용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어느 백화점을 가봐도 가장 붐비는 곳은 상품권 판매대다. 각종 조사에서 받고 싶은 선물 1위로 상품권이 꼽히는 걸 실감할 수 있다. 필요 없는 물건을 선물로 받으면 되레 짐이 되지만 상품권은 그럴 우려가 없다. 선물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현금을 주기엔 뭔가 정성이 부족한 느낌이 들고, 그렇다고 상대방이 원하는 물건을 알기 쉽지 않다 보니 상품권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롯데백화점은 올해 50만원짜리 상품권 20장을 한 세트로 만든 ‘프레스티지’ 상품을 내놨다. 준비한 2500개가 지난 1일까지 모두 팔렸다. 1000개 한정 상품인 100만원짜리 ‘복 상품권’은 발매 2주일만인 지난달 21일 동이 났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1000만원짜리 상품권 세트를 내놓은 데 이어 올해 신권 지폐 크기의 상품권을 선보였다. 현대백화점은 ‘고품격’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제품의 포장을 더욱 화려하게 했다.
 
백화점 상품권이 가장 인기

상품권 중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게 백화점 상품권이다. 백화점 상품권은 전체 상품권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롯데백화점의 상품권 매출은 1조3500억원, 신세계는 1조1000억원, 현대백화점은 3000억원가량 됐다. 이들 ‘빅 3’ 백화점의 상품권 매출은 매년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상품권은 쓰임새가 많을수록 인기가 높아진다. 각 백화점이 외식업체나 레저업체 등과 제휴해 사용처 늘리기 경쟁을 하는 이유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상품권 발행업체마다 제휴업체 늘리기 경쟁을 하다 보니 적절한 업체를 찾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금강·에스콰이아·엘칸토 등 제화업체가 발행하는 구두상품권과 SK·GS칼텍스·현대오일뱅크·에쓰오일 등 정유회사가 발행하는 주유 상품권도 널리 쓰이고 있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줄 선물로는 도서상품권이나 문화상품권이 애용된다.

신인섭 기자

상품권의 주 고객은 기업이다. 상품권의 60~70%는 기업이 구매한다. 직원에게 명절 때 현금을 주면 급여로 분류돼 세금을 내야 하지만 상품권은 복리후생비로 처리해 세금을 안 내도 되기 때문이다. 서강대 임채운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이나 유럽에선 명절이라고 해서 거래업체나 직원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며 “한국 특유의 명절 선물 풍속이 상품권 시장을 활성화시킨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발품 팔면 싸게 살 수도

일반 소비자가 백화점에서 상품권을 사려면 상품권 액면가를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조금만 발품을 팔면 액면가보다 싸게 구입하는 게 가능하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부근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면서 상품권 매매업을 겸하고 있는 김모(45)씨. 그는 10만원짜리 롯데상품권을 9만4500원에 판다. 도매상한테 9만4300원에 사서 장당 200원의 수수료를 받고 파는 것이다. 구두 상품권은 좀 더 수수료를 많이 챙긴다. 10만원짜리 금강제화 상품권의 경우 7만6500원에 사서 7만7000원에 팔아 500원을 남긴다. 서울 명동 일대엔 김씨 같은 상품권 매매상이 10여 곳 있다. 도매상은 상품권 발행업체에서 할인받는 것을 조건으로 억원어치 단위로 상품권을 대량 구입한 뒤 약간의 마진을 붙여 소매상에게 넘긴다. 한 상품권 도매상은 “상품권이 등장하면서 상품권 할인매매도 시작됐다”며 “물품 대금을 상품권으로 받은 하청업체가 상품권을 현금화하면서 시장이 커졌다”고 말했다.

상품권 매매가 늘면서 아예 상품권 온라인 할인판매업체로 등록한 곳도 상당수다. 티켓나라·옥션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업체 중 일부는 매일 상품권 매입가격과 매도가격을 고시하고 온라인으로 거래한다. 할인율은 명동 일대 매매상과 엇비슷하다.

상품권을 지나치게 싸게 파는 온라인 매매상은 주의해야 한다. 특히 설을 앞둔 요즘 e-메일이나 휴대전화 메시지로 상품권을 싸게 판다고 광고하는 게 부쩍 늘었다. ‘○○티켓 3주년 30~50% 할인, 딱 3일! 유명 백화점·구두·주유 상품권!’ 식이다. 상품권 매매업계에서 통용되는 할인율은 백화점 상품권이 5% 안팎, 구두 상품권이 20~40% 정도다. 이보다 더 높은 할인율을 제시한다면 십중팔구 사기라고 보면 된다. 이성만 소비자원 서비스1팀 차장은 “상품권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소비자 피해도 늘고 있다”며 “지나치게 좋은 조건을 내걸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소규모 업체가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상품권은 구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발행업체도 남는 장사

상품권 매매상에서 구입한 상품권으로 세일기간에 물건을 사는 것은 널리 알려진 알뜰쇼핑 방법. 구두 상품권을 액면가보다 20% 싸게 사뒀다가 20% 세일하는 상품을 살 때 이용하면 원래 제품 가격보다 40% 정도 싸게 살 수 있다.

불필요한 상품권을 원하는 상품권으로 바꿀 때도 매매상을 이용하면 된다. 예를 들어 매매상에서 선물받은 20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10만원짜리 구두상품권(할인율 20%) 2장과 5만원짜리 놀이공원 이용권(할인율 30%) 2장으로 바꾼다고 하자. 액면가 20만원짜리 상품권을 액면가 30만원짜리 상품권으로 바꾸는 건데 5만원만 추가로 부담하면 된다.

상품권 제휴업체를 잘 활용하는 것도 노하우다. 할인가격으로 구입한 상품권을 제휴업체인 호텔이나 면세점에서 이용하면 그만큼 이득을 볼 수 있다.

상품권 발행회사도 상품권은 효자상품이다. 자금을 미리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권은 발행 뒤 보통 2∼3개월 지난 뒤에 돌아온다. 길게는 유효기간(발행일로부터 5년)이 다 돼서 돌아오기도 한다. 발행회사는 이 기간에 금융 이득을 보는 셈이다. 판촉 수단으로도 그만이다. 경쟁업체 매장으로 갈 손님을 붙잡아두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또 소비자가 상품권을 갖고 쇼핑하다 보면 상품권액보다 비싼 물건을 구입해 추가 지출을 하는 경우도 많다. ‘낙전 수입’도 꽤 된다. 일반적으로 발행한 상품권 중 2∼3% 정도는 회수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품권을 잃어버리거나 유효기간을 넘기는 일이 심심찮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명 백화점은 유효기간이 지난 상품권도 받아준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기한이 지난 상품권을 가져와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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