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여 현직 영어교사 "Oh, my God"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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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06면

지난달 29일 서울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영어수업 발표회’에서 경북 의성군 점곡초등학교의 김정희 교사가 영어 시범수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내놓은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에 현직 교사들이 반발하고 있다. 프로젝트에 따르면 2012년부터 전국의 중·고교 영어교사는 영어로만 수업해야 한다. 인수위는 현직 교사의 실력이 달리면 교사 자격증이 없는 일반인에게 교직을 개방해서라도 영어수업을 확실히 하겠다는 방침이다.

국내 초·중·고의 영어교사는 3만3162명.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수업의 80%를 영어로, 한 주에 1시간 이상 수업할 수 있다’고 답한 교사는 58.1%에 불과하다. 교사들은 영어 수업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높아진다. ‘현실과 동떨어진 아이디어’ ‘교직의 특수성을 도외시한 결정’이라는 주장이다. 한국교총과 전국영어교사모임이 각각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두 조사에서 모두 60%가 영어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는 데 반대했다.

학생이 선생님 걱정

지난해 7월 부산 용호동 분포초 4학년 수학 몰입교육 시간. 뉴질랜드의 원어민 교사가 영어로 수업하는 동안 한 학생이 손을 들고 교실 뒤편에서 참관하는 담임 선생님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원어민 선생님 말하시는 것 알아들어요?”

학생이 선생님을 걱정하는 세상이다. 초등학교에 영어수업이 도입된 1997년 이후 꾸준히 영어수업을 하고 있는 신귀주(51) 교사의 체험담이다. 그는 부산교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영어교육과 박사과정을 밟을 정도로 영어수업에 열정적이지만 아이들의 반응에 신경이 쓰인다. 용호동은 90% 이상의 학생이 사교육을 받고 20%는 6개월 이상 어학연수를 떠날 정도로 학부모의 교육열이 높은 곳이다. 서울 청운중 임동원 교장은 “교사는 애들 앞에 얼굴(체면)로 먹고사는 직업인데, 원어민 교사와 비교되다 보면 가뜩이나 떨어진 선생님의 사기가 더욱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젊은 교사는 자신감

“영어로만 수업하라고 해도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45분 수업의 절반만 영어로 합니다. 중간에 못 알아듣는 학생이 있어 한국어로 체크를 해야 하니까요.”

서울대 영어교육과 출신의 중동중 박승이(28·여) 교사는 “젊은 교사들의 영어실력이 수업을 진행하는 데 손색이 없다”고 주장한다. 또래 교사 대부분이 1년 이상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추세라고 전했다. 한국외대 영어교육과 이길영 교수는 “최근 영어교육과 학생들은 학기당 5~6개 정도의 말하기 수업을 수강하기 때문에 회화능력이 달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수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교사를 실력 없는 교사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수준이 들쭉날쭉해 중간중간 한국어를 섞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급격하게 영어수업을 확대할 경우 교과목 지식이 학생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원어민 교사는 한국 학생들의 특성을 잘 몰라 교사나 학생 모두가 어려움이 많다고 지적한다.

수능 대비하려면 회화 수업 어려워

수능에서 영어가 없어지는 건 2013학년도부터다. 수능시험에 대비하려면 회화 대신 암기 위주의 수업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수위는 내년에 초·중·고에 6500명의 영어전용 교사를 새로 임용해 회화 중심으로 영어수업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서울 단대부고 이유선(50) 교사는 “3년 전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는 문제를 논의했으나 학생들이 수능 중심의 수업을 원해 포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회화수업을 하려면 원어민 교사처럼 교재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데 수능 위주의 수업에서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서울 자운고 이회주 교사는 “교실과 교재 등 여건이 영어 강의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회화수업은 학생 8~10명 규모가 적당하다. 책상도 원탁이어야 하는데 현재의 책상을 옮겨 원형으로 만들려면 옆 반에서 시끄럽다고 항의한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 자료를 동원해 토론·회화 위주의 수업을 하려면 수업시간이 최소 90분은 돼야 효과를 볼 수 있고, 교재도 듣기-읽기-말하기-쓰기 순으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현재 그런 교재가 없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마이클 러더(60) 아시아 영어교육 담당관은 “확실하게 계획을 세워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영어교육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러더 담당관은 말레이시아·싱가포르·일본·필리핀 등 아시아 8개국의 영어교육을 권장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몰입교육을 하는 말레이시아에서 수학·과학 과목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인수위가 2만3000명의 영어전용 교사를 확보하려는 계획에 대해 “언어능력뿐만 아니라 교수법도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만 외국어 교육에서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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