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마니의 도전정신을 입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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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39면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패션쇼장 내에서만 빛나는 옷을 만들지 않는다. 자신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행동가가 그의 옷을 선택한다. 호사가나 부자는 이제 아르마니에 열광하지 않는다. 명품 매장에 즐비한 물건은 더 이상 희소성의 가치로 진가를 드러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조르지오 아르마니 점퍼

명연을 펼친 할리우드 배우가 걸친 아르마니 재킷은 아카데미 영화제의 레드 카펫 위에서 비로소 아름답다. 명성에 속박되지 않는 인간의 멋이 풍길 때 걸친 옷은 돋보인다. 스스로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이 입어야 태가 나는 옷이 바로 아르마니다. 현란한 장식과 기교는 없다. 신체를 따르는 선의 여유와 단아함뿐. 절제된 균형과 조화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았다면 아르마니를 입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아르마니 컬렉션은 현재 변종(?)까지 포함해 수많은 상품군으로 성장했다. 여성용품은 써보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다. 그동안 아르마니의 여러 제품 가운데 정장과 안경, 향수를 사용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단연 남성 정장 쪽이다. 아르마니는 어깨의 패드와 안감을 떼어냈다. 딱딱한 권위를 몸으로 맞서게 한 인간 회복의 실천이다. 옷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낸 아르마니의 디자인 철학은 혁신이었다.

요즘 입고 있는 아르마니 점퍼가 한 벌 있다. 몇 년 전 J가 불쑥 자신의 집에 데려가 선물해준 것이다. 런던에서 샀다는 고동색 점퍼는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했다. 이 옷을 입을 사람을 찾았고 졸지에 난 첫 수혜자가 됐다. 깨끗이 세탁해서 비닐에 넣어둔 아르마니는 새 임자를 기다리는 동안 나프탈렌 냄새가 짙게 배었다.

정장을 입을 기회가 많지 않은 내게 아르마니 점퍼는 즐겨 입는 겨울 의상이다. 중국의 누비옷을 연상시키는 두터운 질감의 천은 낡을수록 신비한 색감이 배어 나온다. 튼튼하게 재봉질을 한 실땀의 굵기와 간격은 여리듯 강인한 외피의 부드러움을 유연하게 마무리했다. 신체의 비례를 감안한 약간 짧은 듯한 기장은 외려 다리를 길어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입을수록 몸에 붙는 착용감은 몸의 일부인 양 자연스럽다. 옷은 입어서 편해야 좋은 것이다. 팔을 올렸을 때 팔꿈치나 겨드랑이가 당긴다면 재단의 실패다. 지퍼를 닫고 움직여도 점퍼의 형태가 일그러지지 않는 옷. 지퍼 밖으로 드러난 굵은 노끈을 솔기 옆 고리에 걸면 물결 형태의 선이 생긴다. 기분에 따라 두 개 혹은 세 개를 연결하면 옷은 새로운 형태로 변신한다.

난 아르마니의 제품이 아니라 인간 아르마니를 더 좋아한다. 자신만의 무기와 방법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 성과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프로의 덕목이고 향기를 뿜는 구체적 방법일 것이다. 좋은 생각의 공유와 실천, 이보다 더 든든한 ‘빽’은 없다.


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매니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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