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24.제1회 應昌期盃 회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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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89년5월2일,저장(浙江)성의 닝보(寧波)에서 벌어진 제3국은 한수마다 명암이 엇갈렸다.현재 1대1.이 판이 5번 승부의기로라 믿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피를 토하듯 맞섰다.초반엔 조훈현의 빠른 행마가 만개(滿開)한 꽃송이처럼 판 을 압도했으나곧 녜웨이핑(섭衛平)의 집요한 추격이 시작됐다.긴 장마처럼 끈적끈적하고 검은 능선처럼 강인한 섭9단의 추격에 曺9단의 꽃송이들은 차례차례 시들었다.
최후에 曺9단의 3집패가 결정되었을때 40여명의 기자들이 모여있던 방에서 작은 소요가 번져갔다.곧이어 바깥 어디에선가 하늘을 찌를듯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호텔의 전직원들과 팬들이 두 줄로 사람터널을 만들어놓고 섭9단을 기다렸다.대국장을 나선 섭9단이 그 속을 유유히 걸어갔다.박수와 환호가 다시 터져나왔다.그 사람터널은 로비를 지나 호텔 밖까지 이어졌다.밖에는 군중들이 비를 맞으며 그들의 영웅을기다리고 있었다.
5월3일 曺9단은 쓸쓸히 닝보를 떠났다.조훈현은 패배의 순간에 마음이 붙박인듯 도통 말이 없었다.쓰촨(四川)에서 온 한 기자가『촉(蜀)의 땅에 가서 삼협(三峽)을 구경하고 중국 최고의 명주 오량액(五糧液)을 함께 마시자』며 위로했 으나 曺9단은 몽환의 얼굴을 한채 묵묵히 미소를 흘렸다.
며칠전 曺9단은 장제스(蔣介石)의 생가에 가서 「현현(玄玄)」이란 휘호를 남겼다.「무심(無心)」을 쓸까 하다가 「현현」이라 썼다.이상하게도 「무심」을 쓰기가 거북했다.힘이 절정에 오른 섭은 강철손처럼 조훈현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 다.그 앞에서 조훈현이 살아남으려면 오직 무심뿐이었다.그걸 잘 알기에 「무심」이란 글자가 두려웠다.
황해를 건너면 바로 한국이었으나 일행은 다시 항저우(杭州)로기차를 타고 갔다.항저우는 플래카드를 든 데모대가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천안문의 비극이 코 앞에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2승1패로 앞선 섭9단은 껄껄 웃었고 칠십 노구의 잉창치(應昌期)씨는 싱글벙글했다.
아름다운 강남지방,광활한 들판에선 물소가 논을 갈고 반짝이는호수에선 배들이 한가롭게 오갔다.늙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저 밑바닥에서 으르렁거리는데 땅 위에선 20대의 젊은 중국이 질주를 시작했다.
광저우(廣州)로 가서 밤에 홍콩행 배를 탔다.넓은 주강(珠江)을 따라 배가 흘러갔다.깊은 밤,曺9단은 혼자 갑판에 앉아 검게 빛나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비로소 반몽(半夢)의상태에서 깨어난 듯했다.
승부의 순간은 진하지만 지나고 보면 일장춘몽 같은 것.어쨌든섭9단은 기선을 잡았다.바둑 종주국으로의 복귀를 노리는 중국의야심과 서러운 시절을 씻어보려는 한국바둑의 소망이 이번 승부에걸려 있었다.
문자 그대로 세기의 승부였으나 曺9단은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나머지 두판을 다 이길 자신이 없었다.
강성한 섭9단을 이기기 위해 曺9단에겐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했다.4,5국은 9월 싱가포르.그때까지 넉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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