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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2008년 다보스의 신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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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포럼을 이끄는 ‘제사장’ 중 한 명인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은 어제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최근의 사태를 60년래 최악의 금융위기로 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돼온 ‘수퍼 호황’의 종말이고, 기축통화로 군림해 온 달러화에 기반한 신용 확대 국면의 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시장 참가자들이 각자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공익에 가장 부합한다는 시장 근본주의의 위기라는 진단도 내놓았다.

같은 날 영국 컴브리아대학 철학교수인 필립 블론드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신자유주의의 실패’라는 글을 실었다. 그는 부(富)가 극소수의 ‘수퍼 리치(super rich)’들과 교활한 투기꾼들의 손에 집중된 19세기 자본주의 시대로 세계경제가 회귀하고 있다면서 좌와 우, 어느 쪽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우파가 집권한 나라든, 국가 개입주의를 신봉하는 좌파가 집권한 나라든 저임과 복지에 의존하는 빈곤층, 과도한 부채와 고용 및 연금 불안에 시달리는 중산층, 과세와 공동체적 규칙에서 벗어난 극소수의 초부유층으로 사회가 삼분(三分)된 현실은 똑같다는 것이다. 최근의 금융시장 불안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의 파탄에 다름 아니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미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촉발된 이번 글로벌 금융 위기는 금융자본주의의 위험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체조차 불분명한 수많은 파생 금융상품의 홍수 속에서 투자자들은 허황된 행복감을 누려왔다. 하지만 거품이 빠졌을 때 대부분의 피해는 은행 돈 빌려 집을 사고, 증권과 펀드에 투자한 개미들에게 돌아가게 돼 있다.

미국의 경기 침체가 실제상황이 되면서 시장은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1450억 달러의 긴급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기준금리를 0.75%포인트나 인하하는 극약처방을 내렸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불신감이 팽배해 있다. 미국의 경기 침체와 물가 불안 속에 중국마저 타격을 입게 되면 그 결과는 지구적 재난이 될 수 있다.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다보스에서 나오고 있는 이유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이 ‘21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다보스에서 할 연설의 주제로 잡은 이유일 수도 있다.

‘고위험 고수익’이라는 도박의 원리에 입각한 금융자본주의는 생래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 빈익빈 부익부의 심화라는 사회적 ‘부정의(不正義)’ 문제 또한 너무 심각하다. 미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더라도 차기 미 대통령은 사회적 불평등 해소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규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뉴욕 타임스는 전망하고 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은 총수요 진작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는 케인스 자본주의 모델로 전환했고, 분배를 고려하는 복지국가 모델을 택하기도 했다. 이후 자율과 경쟁을 앞세우는 신자유주의가 일세를 풍미했지만 시계추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보호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시장 만능주의자인 이명박 당선인은 6~7% 성장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기업을 옥죄고 있는 규제만 철폐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세계사적 흐름에서 벗어난 시대정신의 이단아가 될 위험은 없는가. 다보스의 2008년 신탁에 당선인은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