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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영빈 칼럼

흐름을 보면 변화를 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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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01년 12월,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90세 생일을 맞은 노과학자 첸쉐썬(錢學森)박사를 찾아 건강을 걱정하고 그의 학문적 위업을 칭송했다. 첸 박사는 1935년 상하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캘리포니아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하면서 초음속 제트 추진기 연구에 몰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엔 미국 국방과학위원회 미사일 주임을 맡았고 55년 중국으로 돌아와 66년 핵미사일 실험을 지휘했으며 70년 발사한 인공위성의 제작 책임자였다. 지난해 발사에 성공한 유인 우주선도 첸 박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성공적인 중국 과학흥국 정책

중국은 80년대부터 과학흥국 정책의 일환으로 '836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가 연구 항목을 지정, 집중 개발해 개발된 기술을 1백여개소 첨단기술개발구에서 제품으로 연결시켜 생산한다. 중국이 최근 나노 기술과 유전공학 등 첨단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한 것도 이 계획의 성과다. 또 99년부터는 해마다 두명의 과학기술 대상자를 선정해 500만위안(약 8억원)의 파격적 상금을 주고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부주석이 직접 시상을 주관해 왔다.

지금 우리나라선 이공계 대학 퇴조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이공계 살리기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정부와 지도자가 과학에 대한 관심을 쏟지 않았고 이를 교육과 연계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그가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 게 과학입국이었다. 외국의 두뇌를 유치하고 부산에 한독실업학교를 세우면서부터 이공계.실업계 교육은 국가 주요 정책으로 자리잡았다. 인문계 위주의 중등교육에 실업교육을 병행시켜 거의 절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기능올림픽 수상자들을 국가적 영웅으로 치켜세웠고 과학기술입국이 사회적 분위기로 띄워졌다. 결국 개발독재의 산업화 역군은 이런 과정을 거쳐 생산되었다. 그때의 이공계 출신 인재들이 지금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되었고 이공계 퇴조현상 속에서도 5명의 이공계 출신이 국무위원급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기준 전 서울대 총장의 전공은 유변학(流變學: Rheology)이다. 흘러가는 물질의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입자가 들어 있는 유체가 움직이는 현상'이다. '흐름을 알고 변화를 일구어 냈다'가 그의 퇴임 기념 문집 제목이다. 나는 그의 문집을 읽으면서 위정자야말로 흐름을 빨리 보고 변화의 정책을 일궈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공계 퇴조를 낙심만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몇푼의 장학금으로도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이공계 살리기는 시대적 과제다. 적신호만 있는 게 아니다. 청신호도 있다. 사법시험 1000명 시대가 되면서 그 좋다는 사시합격 연수원 졸업생이 일자리를 못 찾고 있다. 10년 고생 끝에 나온 전문의들이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 수능 최고 득점자들이 몰린다는 한의학과도 곧 공급이 넘쳐날 것이다. 이들의 갈곳이 이공계고 이들 우수 두뇌를 과학기술 입국정책으로 흡수한다면 우리의 장래 먹거리는 과학기술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우수 여성 인력의 이공계 진출이 해마다 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잘한 일 중 하나로 '차세대 성장동력 10대 과제'선정을 꼽을 수 있다. 5~10년 뒤 한국을 먹여 살릴 성장동력으로 디스플레이, 지능형 로봇, 미래형 자동차, 차세대 반도체, 차세대 전지, 디지털TV 방송, 차세대 이동통신, 지능형 홈네트워크, 디지털 콘텐츠.소프트웨어 솔루션, 바이오 신약.인공 장기 등 10대 과제를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10년 뒤 부가가치 169조원, 수출 2519억달러, 고용창출 241만명 달성이 기대되는 꿈의 청사진이다.

*** '차세대 성장동력' 왜 진척없나

그러나 지난해 8월에 선정된 이 과제들은 지금껏 아무런 진척이 없다. 선거에 코박는 정치 올인에서 벗어나 이 꿈을 현실화하는 것이 국가 당면과제다.

중국공산당 식이나 개발독재식 과학입국은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다. 글로벌 기준에 맞춰 수요.공급의 시장경제 방식으로 손발이 될 이공계 실업교육을 확대하고 우수 두뇌를 창출할 별도의 교육정책을 통해 과학기술 입국과 교육개혁을 동시에 달성할 새로운 이공계 인력 체계를 세워야 한다. 과학부총리를 신설해 교육.경제 부총리와 함께 삼두마차 체제로 이 과제를 파고 들어야 한다. 흐름을 타고 변화와 개혁을 일궈내야 한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