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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칼럼>관철동 시대 22.조훈현.네웨이핑 격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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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항저우(杭州)는 천하미인 서시(西施)의 고향이고 춘추시대 월왕(越王)구천(句踐)이 吳나라를 멸망시켜 와신상담의 고사를 남긴 곳이다.
그러나 1989년 봄,선수단이 내린 항저우공항엔 녹색 전투기들만이 가득했다.비를 맞으며 풀숲에 웅크린 무수한 전투기들.그것들이 머릿속에서 환상의 중국을 씻어냈다.
귀신같이 천문을 짚고 오연히 천하세계를 저울질하던 기인기사들,누루하치의 칼날과 낭랑한 조조의 웃음소리.그런 것들은 더이상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을 건너 뛴 한판의 바둑대결은 어딘지 꿈속같기만 했다.요순의 시대에 만들어졌다가 한때 북망산에 묻혀버렸던 중국의 바둑.그 후예 중에서 불세출의 고수 녜웨이핑(섭衛平)9단이나타났고 이제 한국의 최고수 조훈현(曺薰鉉)9단 이 그와 「천하제일」을 놓고 대결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신출귀몰하는 세계는 아직 끝난게 아니다.
4월25일.숙소이자 대국장인 샹그리나호텔에서 5번승부의 제1국이 시작됐다.
항저우일보의 1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창은 날카롭고 방패는 견고하니 승부는 하늘에 있다(予리盾堅勝負在天).』 창은 曺9단이고 방패는 섭9단이다.철의 수문장이라 불리는 섭9단은 네모진 얼굴의 대식가.칼날같은 눈썹의 曺9단은 예민한 신경의 소식가.白을 쥔 曺9단이 초반 강렬한 접근전으로 앞서가는듯 했으나 섭은 꾸준히 뒤를 쫓아왔다.후반에 曺9단이 지치는 기색이 보였으나 섭9단 쪽에서 먼저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섭의 부인 쿵샹밍(孔祥明)9단이 심장이 약한 섭9단에게 산소흡입을 권하는데 모니터에 비친 그 모습이 안절부절이었다.사실은콩가루가 될 것같은 중압감 속에서 두 사람은 싸우고 있었다.섭9단은 이번에 반드시 「미금(美金)40만금」의 거액을 획득해야했다.그 돈은 약간을 제외하고 국가에 섭의 명의로 헌납될 것이라고 신문들은 쓰고 있었다.
중국 전역에서 4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와 북새통이었다.한국에서도 바둑대회에 기자단이 따라온 것은 처음이었고 중국도 처음이었다. 曺9단의 부인은 항저우의 명찰인 영은사에서 1백8배를 올렸다.그런 기사들이 때마침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공산당대회를왜소하게 만들고 있었다.첫판에 가볍게 3집승을 거둔 曺9단의 방에 호텔의 미녀 종업원들이 밤늦게까지 사인을 부탁하 며 들락거렸다. 식사하러 가면 레스토랑에선 『아리랑』이 울려퍼졌다.
항저우는 계속 실비가 내렸고 호텔 바로 앞의 시후(西湖)는 언제나 엷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曺9단은 새벽에 소동파가 세웠다는 시후를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산책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그곳엔 남루하지만 때묻지 않은 표정의 처녀들이 차를 팔고 있었고그리하여 모든 것은 더욱 꿈속같았다.그러나 시후 저편 대로에선조만간 일어날 천안문사태를 예고하는 자전거데모 행렬이 연일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1국에서 패배한 섭9단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그는 방 속에 틀어박혀 덩샤오핑이 손수 보내줬다는 여자 브리지선수와 브리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그는 이를 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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