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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사가 쓰는 性칼럼]비행기만 타면 발기가 되는 남자

중앙일보

입력

중앙SUNDAY

30대 후반의 L씨는 발기를 위해 상당히 비싼 대가를 치른다. 엉뚱하게도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되도록 멀어져야 발기되기 때문이다.

매사에 철저하고 일 중독인 L씨는 퇴근해도 잠들 때까지 회사 일을, 긴장을 끼고 산다. 늘 마음 한편엔 언제 경쟁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다. 회사에선 승승장구 촉망받는 인재이지만 아내와의 성생활은 낙제점이다. 발기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L씨가 지난여름 모처럼 휴가를 받아 한국을 떠났다. 출발 직전까지 회사 서류 뭉치를 끼고 나섰던 L씨. 필자와 아내의 만류에 결국 모든 것을 내던지고 비행기를 탔다. 업무 스트레스를 벗어 던진 지 사흘째, 그는 몇 년 만에 자연 발기를 이뤄냈다.

원래 남성은 성관계에서 성취감과 정복욕도 충족한다. 그런데 L씨 같은 워커홀릭들은 성취감과 정복욕이 회사에서 다 소진돼 집에선 그저 쉬고 싶을 뿐이다. 설상가상 아내의 투정에 마지못해 관계를 시도하다가 발기되지 않거나 일찍 사정해 버리면 그 순간부터 성생활이 두려워 더 기피하게 된다.

L씨에게 비행기는 힘든 업무와 두려운 안방 침대로부터 도피를 의미했다. 다행히 L씨는 더 이상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자신의 안방에서 발기할 수 있게 됐다. 인지행동 치료로 성행위의 두려움과 기피 현상을 극복하고, 피로와 스트레스에 제대로 대처한 결과다.

누구나 피로하면 발기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일에 찌든 남성 대부분은 휴식만 취하면 당연히 발기는 회복될 것이라고 과신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문제는 만성적인 스트레스 때문이다.

스트레스로 상승된 교감신경은 강력한 혈관수축제인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발기에 필수적인 혈류 충만을 저해한다. 또 성욕과 발기에 필요한 남성호르몬도 감퇴시키는데, 스트레스가 만성화하면 성기능은 쉽게 회복되지 못한다.

스트레스의 만성화를 막으려면 ‘몰빵’형 휴식보다 ‘적금’형 휴식이 옳다. 심신의 휴식과 이완은 그때그때 틈나는 대로 해야 효과적이다. 일에 찌들어 살다 주말엔 잠만 자는 게 휴식이란 생각은 옳지 않다. 매일매일 일과 휴식 사이에 명백한 경계선을 긋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런 점에서 침실은 철저히 심신의 휴식을 배려한 공간이 돼야 한다. 침실에서는 성생활과 휴식 외에 일이나 걱정은 절대 금물이란 원칙을 세워야 한다. 침실 문은 현실의 무게를 벗는 비상구라 여기고,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일상의 중압감을 벗고 멀리 휴양지에 와 있다’는 자기 암시가 바람직하다.

성기능은 심신의 건강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성기능의 저하는 바로 내 건강의 위험을 경고하는 조기 신호다. 이 신호를 방치해 만성화하면 나중엔 훨씬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려면 그때는 늦다.

강동우·백혜경 성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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