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66. 새로운 연주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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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국악과 학생들이 24폭 병풍을 치고 강화도산(産) 꽃돗자리에 앉아 연주하고 있다.

“연주회 날에는 한 학년당 떡 한 시루씩을 쪄오도록 해.”

이화여대 국악과 학생들이 ‘참 알 수 없는 선생님이군’하는 표정을 지었다. 국악과 연주회에 출연하는 학생들에게 떡을 쪄오라고 했으니 의아할만도 했다. 갑자기 학생들에게 지시를 한 것은 그 떡을 청중들과 나눠먹기 위해서였다. 떡 나눠먹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연주회의 마지막 곡은 꼭 야외 풀밭에 나가서 연주했다. 아름다운 이화여대의 풍경을 배경으로 마지막 곡을 마치고 나면 청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두런두런 음악 얘기를 나눴다. 밤이 깊을 때까지 대화가 계속됐다.

 불 꺼진 객석에서 조용히 음악을 듣는 것은 서양식 콘서트의 개념이다. 청중은 무대에 갇힌 연주자의 수준을 평가하고 집에 돌아간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콘서트를 연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벌였다. 대화와 음악이 공존했다. 메마른 연주가 아닌 행복한 축제가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연주에는 두가지가 있다.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이 있는데 보는 사람이 있는 힘을 다 해 음악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선한 연주가 학생들에게는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74년 만들어진 이화여대 국악과의 초창기였다. 국악과라는 것이 서울대와 한양대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생겼을 때다.

 학생들은 서양악기를 전공하다 바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연주 수준도 낮았다. 특히 모든 학생들이 가야금을 전공하는 편중 현상이 나타났다. 나는 궁여지책으로 이들에게 모두 부전공 악기를 하나씩 다루도록 했다. 급하게 배운 악기들을 모아 연주하니 수준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중들은 연주 수준에 상관없이 열광했다. KBS에서는 소문을 듣고 음악회를 녹화하러 오기도 했다. 이런 연주회를 만들어 놓고 나는 한동안 음악회를 미뤘다. 나중에는 오히려 학생들이 “국악과 연주회 언제 하냐”며 나를 졸라 음악회를 해야 할 지경이 됐다.

 학생들에게 국악 연주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또 하나 벌인 일은 무대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우선 편종·편경을 들여와야 한다고 고집해 전국 대학 중 유일하게 이 악기들을 갖췄다. 또 12폭 병풍 두 개를 만들어 연주회 무대에 치도록 했다. 국립국악원에서는 중요한 연주 때 궁중 연회 장면을 그린 진연 병풍을 쳤다.

나는 그림 대신 붓글씨를 떠올렸다. 그리고 조선조의 여류 시인의 한시를 골라 김억(金億·다른 이름은 김안서, 1896년 11월 30일 ~ ?)의 번역본을 쓰기로 결정했다. 서예가인 묵제 권명원이 작품을 24폭에 옮겨 쓰는 데 꼬박 6개월이 걸렸다. 김명원은 “하도 오랜 기간 병풍을 쓰니 처음과 나중의 글씨체가 바뀌었을 지경”이라며 웃었다.

하얀 바탕에 까만 한글 글씨만 있는, 요새로 치면 ‘블랙 앤 화이트’의 병풍 앞에 꽃다운 여학생들이 앉아 국악기를 연주했다. 들은 강화도에서 짜 온 꽃돗자리 위에 앉았다. 품위와 아름다움이 한눈에 보였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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