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인간 몸속을 순환한다는 사실은 1628년 영국 해부학자 윌리엄 하비가 처음 발견했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 주치의인 갈레노스의 ‘체액설’을 1500년 만에 뒤집은 것이다. 체액설은 ‘간에서 만들어진 피는 심장을 통해 온몸에 퍼져 오줌과 땀으로 빠져나간다’는 굳건한 신화였다. 하비의 ‘혈액순환론’은 간신히 정설로 인정받았으나 수혈이 이뤄지기에는 19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영국 의사인 제임스 브룬델이 1818년 사람의 혈액 400cc를 수혈해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는 피의 응고를 막기 위해 헌혈자의 동맥과 환자의 정맥을 직접 연결하는 원시적 방법이 동원됐다.
성인의 몸속에는 약 5L의 피가 돌고 있다. 혈액은 산소와 영양분을 운반하고 노폐물을 실어나른다. 인공심장까지 개발한 현대의학도 완벽한 인공혈액은 성공시키지 못했다. 산소를 실어나르는 대체혈액은 고혈압·신부전증 등 부작용이 심각하다. 노폐물을 운반하고 면역까지 맡는 인공혈액은 아직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수혈 환자들은 여전히 보존기간이 3주, 길어도 35일을 넘기지 못하는 헌혈에 목을 매고 있다.
만성적인 혈액 부족에 시달리는 겨울철이 돌아왔다. 지난해 전체 헌혈자 중 학생이 48.3%, 군인이 20.1%를 차지했다. 방학 때마다 혈액 가뭄이 반복되고 있다. 혈액관리본부는 “현재 혈액 확보량은 O형이 1.7일, 전체 평균이 2.2일로 적정 재고량 7일치에 크게 못 미친다”고 밝혔다. 산모가 제왕절개 시술을 못 받는 경우도 나오는 실정이다. 다급해진 복지부는 동절기에 경기 북부와 강원도를 말라리아 위험 지역에서 해제하는 비상카드를 검토하고 있다. 급한 대로 전방 군인들의 헌혈을 받기 위해서다.
지난해 우리나라 혈액 부족량은 22%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해마다 외국에서 200억원어치 이상의 혈액을 수입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새 우리 사회가 서로 피를 나누는 흡혈박쥐 만도 못해졌다는 서글픈 느낌이 든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