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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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주선이라는 여자애가 갑자기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나서의 며칠동안 나는 머리가 띵한 상태에서 지내야 했다.모든 게 엉망이고 혼돈이었다.가을은 하염없이 깊어가고 있었는데,나무들은 자신을 가리고 있던 잎들을 벗어버리고 바람에 춤추던 잎들 을 바람에 떨구어버리고,이제 앙상한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내 머리 속은 더욱 더 뿌연 안개 속을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학기말 고사가 다가오고 있었고,소라와 가끔 학교 근처의 찻집같은 곳에서 시간 보낸 걸 뺀다면 나는 거의 철저하게 혼자서만놀았다.한번은 소라에게 주선이라는 여자애에 대해서 말해주었는데,내 이야기를 듣는 순간의 소라는 언짢은 표정 이었다.
『어떻게…그럴 수가 있어?그 여자애야 원래 이상한 애라고 치구 말이야.이건 절대로 질투나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지.』 『글쎄 취했었다니까.그리구…몰라,변명처럼 들리긴 하겠지만 말이야.길거리에 만원짜리가 떨어져 있는 걸 보구 안주울 사람이 있겠어.』 『아니 그럼 넌 도대체…아무 여자나 너한테 같이 자주겠다고 그러면 그럴 수 있다는 거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주선이란 애는 도서관에서 만났다니까.』 『그럼 도서관에서 만난 여자애하고는 아무하고나 그런다는 거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봐.너는…정말 더러운 애야.』 『걔는 글쎄…좀 달랐어.돈으로 비유한 건 취소야.』 『관둬.더 말하기 싫으니까.그 여자애를 욕할 거 하나도 없잖아.똑같은 애들끼리 하루를 즐긴건데 뭐.』 『글쎄,안했다니까 그러네.』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도 된다는 거니 넌?』 그렇게 헤어지고 난 다음날이었다.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서는데 소라가 허리를 쿡 찔렀다.나 좀 봐.그래서 우리는 벤치로 가서 앉았다.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이상해.그 주선이라는 여자애… 써니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몰라.』 『난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엉뚱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내가 어딘가에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같은데… 난 아무 것도 모르겠거든.』 『멍달수.이건 순전히 내 예감일 뿐이지만 말이야… 써니가 돌아온 거야.분명해.니주위에서 널 지켜보구 있는 거라구.』 소라가 전철을 타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학교 후문 쪽으로 걸어나갔다.후문을 벗어나 전철역으로 가는 길이었는데,큰길에 연한 골목에서 열서넛쯤 된 여자애가 한 중년사내의 팔을 잡고 울고 있었다.나는 걸음을 멈추고 골목안의 광경을 훔쳐 보았다.
『이러면 안돼.내가 또 연락한다고 그러지 않니.』 중년사내가여자애를 달래고 있었고,그런데 여자애는 계속해서 사내의 팔을 움켜잡은 채로 징징 울고 있었다.
『안돼 아빠.난요… 그럼 난 어떻게 하라구요… 엄마가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엄말 용서해주면 되잖아요.』 나는 한순간 번개에 맞은 것처럼 아찔했다.써니의 아빠….
왜 진작 써니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써니는지나가는 말처럼 몇번인가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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