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칼럼>살아숨쉬는 설악의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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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설악산 백담사를 거쳐 수렴동계곡을 거슬러오르면 가야동과 쌍폭계곡 합수머리에서 대피소를 만나게 된다.
너와지붕에다 통나무집을 지어 산장분위기를 가꾼 그 수렴동대피소에 설악이 키운 산사람 이경수(55)씨 가족이 살고 있다.
그곳에 이경수씨가 없다면 그는 틀림없이 눈덮인 설악산 속을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는 중일 것이다.그렇지 않고 대피소에서 그를 만나게 되면 막소주 한잔 얻어 마시며 설악산에 아직 숨쉬고있는 설악의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술 먹다가 다들 갔지요.용대리의 술친구들… 최운봉이,광택이,우춘이… 뭐 다들 술먹다가 가고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미안합니다.』 얼마전 폭설이 내린 대피소 안에서 그는 오랜만에 만난내게 그렇게 미안하다며 허두를 꺼냈다.미안하다는 말이 입에 발린 이씨는 내설악 들목인 용대리 태생으로 설악산 토박이다.군복무를 마친 64년 설악산으로 아예 입산해 백담사와 오세 암을 오가며 불목하니 노릇으로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러다가 70년부터는 수렴동대피소의 산장지기를 시작했다.
『만약 내가 돈을 알았다면 그때 봉정암에서 머리를 깎았을 겁니다.그런데 돈을 몰라서 속인이 되고 말았지 뭡니까.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죄송합니다.한잔 드시죠.아 예,미안합니다.』 돈을 몰라서 죄송하고 속인이 되어 더욱 미안하다는 그는 평생 코비뚤어지도록 마셔댄 탓에 잘못 만든 눈사람처럼 비뚤어져 버린 큰 코를 옆으로 쓸면서 또 미안해 했다.
부인 안연옥씨와 35년전에 결혼해 3남3녀를 둔 그는 손자를여럿 둔 할아버지다.그럼에도 아직 힘이 천하장사급이어서 그에게는 신화적인 설악의 얘기가 늘 따라다닌다.
조난사고가 날 때마다 그의 힘이 「진가」를 발휘했기에 지금껏그는 설악에서만 60여명의 목숨을 구했고,4백여구의 시체를 산아래로 져내렸다.조난당한 사람이 그의 등에 바로 업히면 살아나고,하늘을 보도록 뒤집혀 업힌 사람은 틀림없이 죽는다.
『산 사람은 제대로 업어 다시 살아가야 할 땅을 보여줘야 하고,죽은 이에게는 다시 못볼 하늘을 마지막으로 보여줘야지요.산신령이 그걸 가르쳐 줬어요.아,이런! 산신령 얘길해서 미안합니다.쭉 들이키세요.미안합니다.』 산장을 찾은 겨울 나그네가 그잔을 단숨에 들이켜 비위를 맞춰주면 그는 틀림없이 이런 자랑도늘어 놓을 것이다.
『요 뒤쪽 가야동에 가면 제가 토굴을 하나 파 두었습니다.새벽1시면 어김없이 산신령이 나타나서 좌정하는 그 토굴로 어느날선녀같은 아가씨가 나타났지 뭡니까.…실은 그 선녀가 제 작은 처입니다.나이는 제 반밖에 안돼도 아이를 벌써 둘이나 낳았지요.아,이런! 마누라가 둘이나… 죄송합니다.아 저런! 아이가 여덟이나 돼서 영 미안하군요,한 잔 더 드시죠.죄송합니다.』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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