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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배명복시시각각

유럽과 평양에는 왜 특사 안 보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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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 당선인의 특사가 조만간 미국·중국·일본·러시아로 떠난다고 한다. 이른바 한반도 주변 4강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중국 특사로 베이징을 방문하고, 정몽준 의원은 워싱턴으로 날아간다. 친형인 이상득 의원은 일본 특사로, 최측근인 이재오 의원은 러시아 특사로 각각 파견된다.

왕조 시대의 ‘사대(事大)외교’를 연상시킨다는 떨떠름한 시각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게 안 본다. 정권 출범을 앞두고 필요한 나라에 사람을 보내 새 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을 설명하고,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것은 명분을 떠나 실리 차원에서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특사로 가는 사람에 대한 배려에 오히려 무게를 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 것 같지만 이 또한 문제 삼을 건 아니라고 본다. 신임만 실리면 누구라도 특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아버지 부시를 특사로 잘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는 4강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지정학적 조건이다. 좋든 싫든 역사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고, 지금도 정치·경제적으로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라들이다. 특사 파견 대상국을 주변 4강으로 한정한 것은 어느 면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4강의 좁은 울타리에 갇혀서는 우리의 활로를 개척할 수 없다는 것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좁은 땅에 부존자원은 없고 인구는 너무 많다. ‘수출입국’을 통한 지난 40년간의 압축 성장 과정이 보여주듯 우리는 밖에서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대륙과 해양으로 계속 뻗어 나가야 한다.

4강 외교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는 수동적 외교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바로 이 점에서 당선인의 시야에서 빠진 것이 유럽연합(EU)이다. 특사 파견 대상에 EU를 포함시켰더라면 한국이 4강 외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를 향해 능동적인 열린 외교를 하려 한다는 상징적 메시지를 발신(發信)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EU는 중국에 이어 둘째로 큰 한국의 교역 상대다. 지금까지 한국에 직접 투자를 가장 많이 한 곳도 미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EU다. 유럽은 더 이상 늙은 대륙이 아니다. 활력이 넘치는 젊은 대륙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서서히 기울고 있는 미국이나 그 대항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는 또 다른 세계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아프리카나 중동으로 가려면 여전히 거쳐야 하는 곳이 유럽이기도 하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특사 파견 대상에 북한이 빠져 있는 점이다. 북한을 통하지 않고서는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갈 수 없다. 북한이 가로막고 있는 한 우리는 섬나라나 다름없다. 주변 4강에 특사를 파견하면서 정작 북한에는 사람을 안 보낸다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 된다. 당연히 북한에도 특사를 보내 당선인의 ‘비핵·개방 3000’ 구상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 결단을 내리고 개방을 추진하면 10년 내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발 벗고 나서겠다는 공약 말이다. 당선인의 약속대로 경제를 살리려면 한반도 정세의 안정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외교적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그만큼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 상반기 EU의 순번제 의장은 슬로베니아의 야네스 얀센 총리다. 브뤼셀에는 EU의 외교정책 대표인 하비에르 솔라나가 있다. 이 당선인은 류블랴나와 브뤼셀에 특사를 보내라. 평양에도 서둘러 특사를 파견하라.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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