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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신년특집 조용필 40년 울고 웃던 40년 2. 그 겨울의 찻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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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초등학생 때였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조용필의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다. 이따금 아버지의 술친구들이 몰려와 노래 한 곡 해 보라고 졸라대면 어쩔 수 없이 부르던 이은하의 ‘밤차’나 여느 동요와 달랐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 돌아오는 어스름한 저녁 골목에서, 문제집을 풀다 말고, 밑이 펑 뚫린 재래식 화장실에 앉아 ‘창밖의 여자’를, ‘못 찾겠다 꾀꼬리’를 불렀다. “돌아서 눈 감으면 강물이어라, 한 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을 이해하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창 유행하는 음악이면 자의든 타의든 들어야 하는 지금 같은 환경이 아니었다. 워크맨으로 대표되던 휴대용 카세트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가끔 들은 노래가 내 속에 입력되어 마치 나의 박자처럼 흥얼흥얼, 입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열네 살 때였다. 또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오빠를 외쳐대는 무리에 섞여 있었다. “기도하는” 캭, “포옹하는” 캭, 아이들은 아무데서나 소리를 질러댔다. “오빠? 삼촌이면 몰라도.” 그땐 왜 비딱했는지 모르겠다. 학교 문방구에는 연예인의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었다. 통통한 뺨에 귀를 덮는 장발인 조용필의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오빠를 외쳐대는 애들과 나란히 서서 하드를 빨면서 “왜 그대의 이름은 용필이인가요”라고 비아냥댔다.

솔직히 그의 외모는 평범한 편이고 이름은 너무 촌스러웠다. 공개방송을 보려고 방송국으로 몰려가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쓸쓸히 뒤돌아섰다. 내게는 오빠가 없었다. 한 번 골목의 나이 많은 남자애를 오빠라고 불렀다가 어머니에게 경을 쳤다. “아무한테나 오빠라고 하지 마라.” 나는 오빠, 용필이 오빠, 라고 입을 떼 보았다. 호부호형을 하지 못하는 홍길동의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왜 우리는 조용필에게 열광했는가. 오빠부대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게 다 그 때문이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막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단발머리’는 딱 우리의 이야기였다. 그의 노랫말이 들려주는 미지의 세계는 기대에 부풀게 하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한 세계였다.

그때 아이들에게는 진짜 오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애들의 오빠는 나이에 맞는 경쾌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구호 속에서 일찍 철이 들었다. 그렇지 않은 오빠들은 두 손가락 끝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건들거리거나 방바닥에 뒹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오빠들 틈에서 어느 날 오빠가 나타났다. 시절은 하 수상했다. 노래들은 많았지만 너무나 희망적이거나 너무나 무거웠다. 그 틈을 타고 신시사이저의 “뿅뿅뿅” 소리를 앞세운 오빠가 나타났다.

잠깐 학교 벤치에 놓아 둔 가방이 없어졌다. 다음 날 그 가방은 학교와 한참 떨어진 한강변에서 발견되었다. 회수권은 물론이고 약간의 돈, 그리고 브로마이드가 없어졌다. 나는 친구들 몰래 문방구의 마일리지를 조용필의 브로마이드로 바꾸었던 것이다. 돌돌 구겨지지 않도록 말린 브로마이드를 펴며 낄낄댔을 아이들이 떠올랐다. “잘난 척하더니 저도 별 수 있어?”
 열아홉 살 때였다. 어느 날, 나는 ‘그 겨울의 찻집’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크게 불러도 좋지만 읊조리기에 제격인 노래가 많다. 누군가를 위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의 노래를 그토록 수없이 읊조린 건 아마도 내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아서라는 느낌이 든다. 그 시절 우리는 위안이 필요했다. 그 뒤로 우리는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의 ‘그 겨울의 찻집’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40년 대중음악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나는 좋다. 어느 날 그가 커다란 행사의 오프닝 행사에 쓸 음악을 맡았다거나 종전과는 다른 ‘아트’를 하겠다고 방향을 틀었더라면 내 속에서 읊조리던 그의 노래들은 사라졌을 것이다. 대신 그는 그런 요소들을 자신의 음악 속에 융화시켰다. 그는 자신의 음악으로 대중의 눈높이를 끌어올렸다. 무슨 일을 하든 몇 살이든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중략)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라는 노래를 부를 땐 누구나 시인이 된다.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파블로 네루다에게서 ‘메타포’를 배우는 우편배달부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시적’이라는 발효제로 대중음악의 폭을 풍성하게 부풀려 놓았다. 10대 후반 뭣도 모르고 읊조리던 ‘그 겨울의 찻집’을 지금 나는 다시 듣는다. 그의 목소리에서 바람소리가 난다. 그는 노래와 노랫말이 겉도는, 노래만 잘하는 가수가 아니다. 그의 노래는 곧 그의 이야기다. 그는 뼛속까지 진정한 가수다. 나는 이 글이 25년(때로 훤한 인물의 가수들에게 눈길을 한번도 주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결같이 조용필이라는 가수의 노래 속에 자란 한 사람의 연애편지로 읽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편지의 끝은 오빠 사랑해요, 라고 맺는다.

하성란(소설가),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베스트10 선정위원

임진모·송기철·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이영미(『한국대중가요사』 저자), 김종휘(문화평론가), 신승훈·이승철(가수), 주철환(OBS 경인TV 사장), 하성란(소설가), 이재무(시인) 총 10명. 그들 각자에게 조용필 히트곡 15곡 내외를 추천받아 그중 10곡을 엄선했다.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양인자(작사)·김희갑(작곡)씨 콤비로부터 이 곡을 받았을 때 “이건 정말 좋은 곡이다”고 직감했다. 일단 가사가 너무 좋았다. 한편의 시였다. 우리 정서에 맞는 멜로디를 갖추고 있어 한마디로 딱 우리의 가요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가요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원래 다른 사람들로부터 곡을 받을 때 내 나름대로 검토를 하는 데, ‘그 겨울의 찻집’에는 그런 과정이 필요 없었다. 내 노래 중에 겨울에 대한 노래가 흔하지 않았는데, 이 노래는 조용필의 겨울 정서를 채워 준 대표적인 곡이다. 지금도 겨울만 되면 늘 불리고 있다. 처음 발표했을 때 ‘킬리만자로의 표범’ ‘허공’ 등에 가려 크게 히트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생명력을 갖게 됐다. 그게 바로 노래의 힘이다.

후렴구는 조금 높지만, 전체적으로 부르기 편해 노래방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다. 음계 자체도 편한 느낌을 준다. 표현력이나 작품성을 부각시키면 사람들이 골치 아프게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노래는 참 편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안는다. 콘서트에서 내가 굳이 부르지 않아도, 관객들이 다 함께 합창하는 노래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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