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파키스탄 … 정치 불안에 식량 위기…“폭동 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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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피살된 파키스탄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지지자들이 5일 카라치에 있는 그의 자택에 모여 추모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영국 경찰이 진상 조사를 지원하는 가운데 부토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유엔도 조사에 참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카라치 AP=연합뉴스]

정정 불안으로 밀가루 값이 폭등하자 파키스탄 사람들이 5일 값싸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토속 밀가루 빵인 ‘로티’ 가게에 몰려들고 있다. 이로 인해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로티 판매점들은 매출이 크게 늘고 있다. [이슬라마바드=최형규 특파원]

 “밀가루 값이 이렇게 오르면 우리더러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5일 오후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중심부 스쿨 거리에 있는 VIP 수퍼. 택시를 모는 마메드 라시드(37)가 1kg짜리 밀가루 봉지 두 개를 들고 주인인 모신 소아이프에게 항의했다. 손님의 볼멘소리에 주인은 “일주일 뒤면 가격이 두 배로 오를지 모른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동안 실랑이를 하던 라시드는 한숨을 쉬며 네 식구의 일주일치 식량인 10봉지를 300루피에 산 뒤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극심한 정정 불안을 겪고 있는 파키스탄에 식량 위기가 닥쳤다. 지난해 12월 27일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 피살로 인한 후폭풍이다. 파키스탄 국민의 주식인 밀가루가 품귀현상을 빚어 일부 도시에서는 사재기가 극성이다. 이대로 가면 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정치불안이 국민 생존까지 위협하고 있는 셈이다.

 최대 도시인 카라치는 밀가루 때문에 폭동 전야다. 이전보다 두 배나 비싼 ㎏당 35루피(531원)에도 밀가루 구경을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지난 주말 카라치 중심부의 생필품 가게인 ‘유틸리티 스토어’에서는 밀가루를 판매한다는 소식을 들은 300여 명의 시민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10여 명의 부상자까지 발생했다. 그나마 판매 시작 20여 분 만에 밀가루가 동나 시민들이 1시간이 넘도록 거칠게 항의했다. 라피아 자카리아(주부)는 “부토 전 총리 암살 이후 밀가루 공급이 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상인들과 일부 시민이 앞다퉈 사들이고 있다. 그 바람에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 폭동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심정”이라며 한숨지었다. 라호르와 부토 전 총리가 피살된 라왈핀디 지역 역시 밀가루 품귀현상이 심각해 가격이 이전보다 최고 6배까지 올랐다.

 이 같은 밀가루 파동은 부토 피살 사건 이후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밀가루 운반 차량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정정 불안을 우려해 미리 식량을 확보해 놓으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분회사들은 밀가루 운송을 전면 중단했다. 여기에 일부 상인의 매점매석까지 가세했다. 파키스탄 제분업회 신 안사르 자와드 회장은 “펀자브주의 경우 주정부가 밀과 밀가루 자체 운송금지령을 내려 사정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피살된 이후 불안해진 정국으로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것은 경제다. 우선 파키스탄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겨 관광업계는 아예 문을 닫을 정도다. 이슬라마바드의 한 관광업자는 “부토 피살 이후 지난 10여 일 동안 순수 관광 목적으로 찾아온 관광객이 전혀 없다”고 푸념했다. 그는 “시내 20여 여행업자는 아예 휴업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슬라마바드의 대표적 쇼핑가인 아라칸 거리 주변 상인들도 울상이다.

 이곳에서 4년째 스위스 시계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타리크 살림도 요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 연말 특수를 노리고 500여 개의 각종 스위스 시계를 선금으로 수입했는데 부토 피살 이후 외국인 관광객 손님이 아예 실종됐기 때문이다. 살림는 “최근 10일 동안 판 시계가 10개도 안 된다. 이 상태가 한 달만 더 지속되면 직원 두 명을 휴직시켜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가게에서보다 친구나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시계를 염가에 파는 세일즈맨이 됐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 밖에도 서점은 40%, 타이식당은 50%가량이 각각 줄었다. 아라칸 상가 운영본부 샤우카 콰디르 부장은 “대부분의 가게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어 1월 임대료가 제대로 걷힐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택시 운전기사들도 한숨이다. 폭탄테러를 의식해 시민들이 외출을 삼가고 주요 고객이던 외국 관광객이 없기 때문이다. 공항과 주요 호텔을 오가며 영업하는 살림 H 알리로 택시 운전기사는 “부토 전 총리가 피살된 이후 3일 동안 태운 손님이 딱 10명이라면 믿겠습니까”라고 기자에게 반문했다. 그는 이 때문에 올 수입이 평소의 절반에 불과한 1000루피(1만5160원)에도 못 미쳐 자녀 학비는 고사하고 먹고살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파키스탄인들이 식사 대용으로 즐겨 찾는 로티(전 형태 밀가루 빵) 가게는 얼굴이 희색이다. 한 개에 4루피(약 60원) 하는 로티는 한 개로 한 끼를 때울 수 있기 때문에 벌이가 시원찮은 서민 고객들이 늘었다. 아라칸 거리의 아지드 로티 집은 평소보다 40%나 늘어난 하루 500여 개를 판매하고 있다. 평소 2~3개 사가던 손님들이 5개 이상씩 사가는 경우가 많은 게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도 주인 기아 노디다는 걱정이다. 그는 “한 달 전 20㎏ 밀가루 50여 포대를 미리 확보해 놓아 가격을 올리지 않고 있는데 최근 밀가루 가격이 폭등해 다음달부터는 로티 한 개당 6~8루피로 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꽃 가게도 즐겁다. 부토 피살 이후 영전에 조화를 보내는 시민들이 급증해서다. 이슬라마바드 85번가에 위치한 파키스탄인민당(PPP)사에는 5일 하루에도 50여 개의 조화가 배달됐다. 대부분 시민이 보낸 조화다.

이슬라마바드=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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